[좋은생각 행복편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입력 2014-03-04 06:49:01

올해 1월 태국의 피부과 의사 한 명이 제가 근무하는 모발이식센터에 연수를 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태국의 고위공무원 출신이며 굉장히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미국 보스턴에서 유학했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 굉장히 검소하고 예의를 갖추는 것에 대해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얼마 전 태국 의사의 두 눈이 충혈돼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방콕에서 반정부 시위 도중 시위대에 던져진 수류탄이 터져서 파편을 맞은 4세와 6세의 남매가 병원에 이송되었는데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그 소식을 수술을 담당한 소아외과 의사인 친구에게 듣고 밤새도록 울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수 오기 전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방콕에서는 시위가 계속 진행 중이었고 그때 자신은 부상자를 돌보는 일에 자원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바로 머리 옆으로 최루탄이 지나가는 것을 경험한 후 남편이 더는 시위하는 곳에 가지 말라고 극구 말렸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도 조국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면서 정치를 떠나 다친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봉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순간 울컥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한국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태국에 갔을 때 이상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국왕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어색해서 북한을 떠올렸습니다. 태국도 우상화 교육이 있나 보다 생각했는데, 국왕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것이 국민의 자발적 행위라는 것을 알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왕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실제로 푸미폰 국왕은 가난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마을을 직접 운전해서 찾아가곤 했답니다. 60년간 국왕은 수천 개의 왕실 프로젝트를 사비를 털어가며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프로젝트 대부분은 가난한 시골이나 열악한 고산지대의 삶의 질 개선, 환경 및 교육사업 등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고민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국민은 깨끗한 사생활과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준 왕실을 극도로 존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술자리에 둘만 모여도 정치인, 대통령 가릴 것 없이 오징어 안주처럼 씹는 우리나라에서 진심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있을까 하고 강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런 태국의 문화를 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과거 백년전쟁 중에 영국이 프랑스 칼레 지역을 점령했을 때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6명의 칼레 시민이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놓는다면 나머지 시민의 목숨을 살려주겠노라고 공표하였습니다. 이때 귀족 6명이 지원해서 시민 목숨을 구하러 나서고 이에 감동한 영국 왕이 처형을 취소한 것에서 이 말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없었던 문화는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가 경주 최 부잣집입니다. 최 부잣집의 가훈 중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고 만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에는 논 사지 마라'는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줍니다. 이런 가훈 덕분에 경주 최 부잣집은 400년 동안 부를 누리고 지금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가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예가 적지는 않지만 현재 상황은 좀 아쉽습니다. 자신 있게 예로 들만 한 것이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작년 인사 청문회에서 많은 이들이 병역특혜, 위장전입, 탈세의혹, 재산형성 과정의 투기 의혹 등으로 낙마했다지요. 영국에 있을 때 런던 근교의 이튼스쿨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영국 왕자들이 다녔다기에 소위 귀족학교라는 선입견을 품고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1,2차 세계대전에서 이튼 출신 전사자 2천여 명의 이름을 학교 본부 벽에 빼곡하게 새긴 것을 보고는 그저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 인사 청문회에서 최소한 멀쩡한 사람들의 병역 비리 얘기는 더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홍용택/경북대병원 모발이식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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