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⑦-유목의 본질은 새로운 배치다

입력 2014-02-25 07:48:32

그렇다. 앉아서 유목하기란 이처럼 시작도 끝도 없다. 물론 대상도 주체도 따로 없다. 그저 무수한 사건들의 생성만이 있을 뿐! 그러므로 진정한 노마드란 초원으로 도주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선 자리를 목초지로, 스텝으로 만드는 것일 터. 과연 우리는 종로로부터 서울을, 아니 서울로부터 세계를 긴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고미숙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중에서)

우리 모임의 성격은 자유롭다. 모임 구성원들은 대부분 다른 모임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인성 교육'이니, '논술 교육'이니, '배움의 공동체'니, '수업 평가'니, '교육과정'이니, '영재교육'이니, '독서토론'이니, '도서관 활용'이니 하는 서로 다른 정책의 전문가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임의 구성원들은 나름대로 각기 다른 소통의 통로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소통은 새로운 소통의 길을 만들고 그것이 제각기 힘을 발휘한다. 내적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영역은 오히려 확대된다.

모두 우리가 하는 책읽기, 책쓰기, 토론 교육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정책들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폄하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정책들은 도움을 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미 다른 정책과 연계된 구성원들이 많기 때문에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히려 다른 정책들이 지닌 장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사고가 가능하다. 또한 책읽기, 책쓰기, 토론 교육이 지닌 의미가 모든 교육정책의 기초 역량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정책들과는 경쟁보다도 상보적인 관계를 지닌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 아주 쉬운 일이란 없다. 의미 부여가 큰 만큼 주어지는 장애도 크다. 둘러싼 환경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시대정신도 달라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도, 사람도 변할 게다. 당연히 나도 변하고 내가 포함된 모임의 성격도 변할 게다. 그러한 변화와 환경들이 현재의 나를, 현재의 모임을 힘들게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지금 여기'가 힘들다고 '어제 거기'로 돌아갈 수 없고, '내일 저기'로 도피할 수도 없다. 여기가 고통스럽다고 여기보다 자유롭고 편한 공간으로 달아날 수도 없다. 알고 보면 그런 공간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가 있는 '지금 여기'를 사막이 아닌 초원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능동적인 대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의 배치를 바꾸어야 한다. 한숨을 쉬면서 '지금 여기'를 탓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지금 여기'를 받아들이면서 '지금 여기'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기보다는 '나우토피아'(지금 여기가 천국)를 지향한다. 그것이 진정한 유목이다. 따라서 유목은 떠돌이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 발을 디디고 이루어지는 분산이고 확산이다. 유목이 분산이고 확산이라면 분산과 확산이 위치하는 좌표를 설정하는 '배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유연한 모임' '느슨한 연대'에서의 배치는 자유롭다. 모임의 내적 관계를 고정시키면 경계가 명료해지는 만큼 활동 에너지는 크게 위축된다. 경계의 명료함이 모임의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임마다 팀장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지시하는 대상이 아니다. 팀원 중의 한 명일 뿐이고 회의가 이루질 때마다 회의를 주재하고 내용을 정리한다. 각각의 모임들은 나름대로의 냄새와 색깔로 그들을 규정한다.

하지만 교육 전체의 시각으로 보면 그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개개인이 지닌 냄새와 색깔, 작은 모임들이 지닌 개별성은 '배치'를 통해 동화된다. 토론 어울마당에 책쓰기 모임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책쓰기 축제에 토론 모임이 일손을 돕는다. 서로 다름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정책은 더욱 발전한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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