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행복편지] 제가 할게요, 느낌 아니까

입력 2014-02-11 07:25:39

"이건 또 뭐야. 여기 옥상에서 맞짱 뜨는 신이 있는데 이거 제가 할게요. 느낌 아니까." "안 돼! 위험해. 대역 쓸게." "이건 정말 제가 할게요. 느낌 아니까. 옛날에 흑장미파 짱과 싸우고 학교에서 잘려 봐서 이 느낌 잘 살릴 수 있어요." "여기 남자랑 1박 2일 여행가는 신이 있지. 이걸 잘해야 해." "아니 사장님. 난 이미지 관리상 남자랑 손도 안 잡는 거 몰라요? 흥!" "야, 상대역이 이승기야." "짐 싸 볼게요. 느낌 아니까."

개그콘서트의 뿜엔터테인먼트라는 코너에서 사장과 여배우가 나누는 대화입니다. 이 대화에서 여배우가 빠르게 뱉어대는 '느낌 아니까'라는 말이 작년의 최고 유행어로 뽑혔다지요. 이 말에 왜 메가톤급 웃음이 펑펑 터졌을까요? 그 이유는, 보통 사람들이 주저하는 일에 이 철없는 배우가 느낌을 안다면서 천방지축 나서는 꼴이 우습기 때문이지, 이 유행어의 문법에는 웃음을 자아낼 만한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느낌을 알면 어떤 행위나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건 당연하니까요.

지난 설 연휴에, 가족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서 한바탕 신명풀이를 하셨다면 그때 그 필름을 되돌려 보십시오. 늙으신 어머니는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참고 견디며 살아온 내력을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으로 풀어내셨을 테고, 아버지는 또 어깨 처진 자식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아들딸이 잘되라고 행복하라고' 목멘 소리로 '아빠의 청춘'을 불렀을 테지요. 왜 하필 그 노래냐고 물으면 다들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느낌 아니까'이겠지요.

생각의 한 도구로서 이 '느낌'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역사상 인류 삶의 지평을 넓혀 온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 발명가들에 의하면 창조적인 생각은 느낌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먼저 깊은 느낌과 섬광 같은 직관을 통해 답이라고 할 만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난 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답이라고 확신하는 그 이미지를 하나씩 차근차근 논리적인 말이나 기호 또는 수식으로 정리한답니다. 이런 관점에 서면 주관적 느낌과 직관은 과학적'합리적 사고의 방해물이 아니라 그 원천이자 기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사고체계에서는 전(前) 논리적 사고, 즉 느낌을 홀대하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 현장이 그 대표적인 사례지요. 이어령 선생이 '생명은 자본이다'라는 책에서 밝힌 자신의 경험담인데요. 어린 시절,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울 때 훈장님의 선창에 따라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을 큰 소리로 외우다가 천지현황, 즉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뜻풀이에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아 질문했답니다. "왜 하늘이 파란데 검다고 하나요?" "밤에 보면 까맣게 보이지 않더냐." "그러면 땅도 까맣다고 해야지 왜 누렇다고 하나요?" "조그만 녀석이 왜 자꾸 토를 달아 선생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 이쯤에 이르면 아이들은 자신의 느낌을 제쳐 두고 선생님이 설명해주는 내용을 맹목적으로 외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되도록 빨리, 많이 외워서 좋은 점수를 따는 데 전력을 다하는 게 상책이지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이 공부 방식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아니 더욱 공고해졌다고 봐야지요. 시대는 통섭과 창조적 상상력, 느낌을 강조하는데, 높은 과목의 담장 안에 갇혀 수학은 수식 안에서, 시와 소설은 단어 안에서, 과학은 과학적 논리 안에서, 음악은 음표 안에서만 생각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은, 학생들을 눈먼 개념의 하수인으로 만들 뿐, 자기 공부의 진정한 주인으로 나서는 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공부뿐이 아니라 모든 인간사에서도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 단독적인 삶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주인이 되는 길은, 풍문이나 눈치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느낌이 문제 상황을 읽는 창이고, 합리적이고 주체적인 사고의 뿌리이며 그 해결의 실마리입니다. '제가 할게요. 느낌 아니까.' 적당한 긍정의 냄새에다 주인의 단호한 기까지 내비치는 이 유행어가 새해에는 우리네 삶의 현장에 더 널리 퍼져도 괜찮을 듯합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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