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청춘 발언대] 응답하라 2014

입력 2014-01-11 08:00:00

지난달, 고려대 주현우 씨가 시작한 '안녕들 하십니까'란 질문은 불과 며칠 만에 전국 대학가 곳곳에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침묵과 무관심을 강요받던 세대'라 여겨졌던, 성적과 취업에만 관심이 있다던, 젊은이들이 대자보를 붙인 것이었습니다. 놀라웠습니다.

모두는 젊은이가 이 사회에 대해 할 이야기가 없다고, 혹여 있더라도 그저 순응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사회에 대한 일말의 '책임 의식'은 있어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행동의 시작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그저 '이야기'를 꺼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대자보는 강령이나 선동이 아닌, 누군가의 고백이자 반성이었습니다. 누구에게 말하지 못한, 하지만 우리 모두에 대한 고백. 그리 거창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이유는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대자보는 수많은 젊은이가 세상과 여러 사람에게 던지는, 그 자체로 반가운 '인사'였습니다.

물론 이 인사가 모두에게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젊은이들이 이런 행동에까지 나섰을까' 하는 반성, 민영화라는 사안을 두고 무작정 반대의 의견을 고수하는 이들에 대한 우려로 말입니다. 어떤 이에겐 대자보는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비이성적인 판단에서 나온 사회를 향한 공격이었습니다. 대자보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대자보와 그 반응을 통해 알게 된 건, 우리가 한쪽은 '종북'으로, 다른 한쪽은 '일베충'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씁쓸한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 정의했습니다. 대자보가 '정치적이었다'는 의미는 슈미트의 개념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적과 나의 입장을 구분 짓고, 끊임없이 싸우는 것. 수많은 정치적 현안과 실제적 문제들이 부딪치는 투쟁의 장으로서 '정치' 말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 역시도 결코 단순히 정치기구 내의 토론과 합의만으로 모든 것이 진행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투쟁으로서의 정치가 한 나라 안에서 유익할 수 있다면,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안전하게 그리고 진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공동의 믿음이 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신뢰가 바탕에 있지 않다면 한 국가와 정치체제 안에서 정상적이고 건강한 합의는 기대하기 힘들 겁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하여 무시하고, 심지어 적이라 하여 제거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의미의 정치를 만나야 할지 모릅니다. 힘과 강압으로 이루어지는 정치는 결코 민주주의 체제 내 형태의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뒤집어 보았으면 합니다. 문제는 각자의 의견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문제가 터져 나온 그 바탕에 주목하기를 말입니다. 민영화의 문제 기저에는 정부 실패가 있습니다. 좌우의 해결책은 다르겠지만, 정부가 실패한 요인과 문제의 심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종합적인 상황 판단과 논의가 먼저 필요합니다.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이미 먼 길을 돌아왔기에, 회복을 위해 그보다 더 많은 길을 걸어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공동체의 근본적인 철학이 부재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위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되돌리거나, 정지할 순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가 이상적일 순 없지만, 그럼에도 바로 우리의 터전이기에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해입니다. 올해엔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기 원하는지 고민하고 질문해 보았으면 합니다. 용감하게 질문했고 이야기했던 2013년 끝머리를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모두가 질문하고, 또 응답하는 한 해. 언젠가는 서로에 대한 신뢰로 대화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대구경북 대학생문화잡지 '모디' 편집장 smile5_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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