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당신을 믿습니다

입력 2014-01-09 11:13:12

잠시라도 독일에 머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독일인은 운전을 잘한다'는 데 동의한다. 운전 솜씨가 뛰어나다는 말이 아니다. 설 때 정확하게 서고 법규를 잘 지킨다는 뜻이다. 보행자가 횡단보도에 발만 들여놓아도 어김없이 차들이 멈춰 선다. 그러나 보행자가 없는 한적한 도로에서는 빨간불이더라도 일단 속도를 줄인 후 주변 상황을 살펴 그대로 통과한다. 국민성대로 운전도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다.

독일의 교통법 규정은 명확하고 쉽다. 대원칙만 알고 지키면 소통에 지장이 없다. 그렇다고 운전자 양식에만 기대지도 않는다. 엉덩이에 뿔 난 사람은 어디에나 있어서다. 법규를 어기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도록 한다. 그러니 우리처럼 교통 캠페인으로 힘 뺄 일이 없다. 한 사례로 유럽 각국은 횡단보도 바로 앞에 신호등이 있다. 교차로 너머 신호에 맞추려고 과속하거나 정지선을 넘어 급정거할 이유가 없다. 정지선을 넘어서면 진행 방향의 신호등을 볼 수 없어 자연히 정지선을 지키게 되어 있다. 운전자 양식과 시스템이라는 이중 장치가 안전하고 여유 있는 운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운전은 안전과 원활한 소통을 전제로 한 사회적 약속이다. 이런 사회적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독일의 보행자는 눈치 보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자동차가 먼저 속도를 줄이고 설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만약 우리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느릿거리면 여지없이 경적이 울리고 욕하고 속도 올리다 구급차 신세다. 법규는 있되 사회적 약속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 물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크다는 말이다.

OECD 국가 중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률 1위(11.3명)라는 결과는 우리 사회의 갈등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다. 한국인이 교통사고와 같은 분쟁으로 겪게 되는 고통과 스트레스는 엄청난 경제적 비용을 요구한다. 대원칙을 무시한 결과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대립은 다른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범죄와 빈곤, 자살 등 다른 사회적 요인과 과연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을까.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가 보고한 우리 사회의 갈등지수는 OECD 30개국 중 4번째로 높다. 특히 각종 사회적 갈등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연간 약 300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보고서는 각종 범죄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국내총생산의 약 16.2%인 158조 원이라고 추산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회 구성원 간 신뢰와 관용의 문제다. 통계청의 '한국 사회 동향 2013'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10명 중 2명(22%)에 불과했다. 타인이 자신을 이용하거나 해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압도적이다. 박명호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지표를 활용한 한국의 경제사회 발전 연구' 논문에서도 우리의 초라한 자화상을 읽을 수 있다. 실업률이나 노령자에 대한 사회 지출, 노인 고용률, 도로 사망률, 자살률 등 사회 안전 부문은 OECD 30개 회원국 중 바닥권이다. 특히 타인에 대한 관용 등 관용 사회 부문 순위는 꼴찌다.

기본과 원칙에 취약하면 그 어느 것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인색한 사회는 사회 정의는 물론 신뢰와 평등, 경쟁력 등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신뢰와 규범, 사회적 네트워크 등 사회적 자본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구성원들의 공감과 협력을 촉진해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를 부른다. 세계은행이 사회적 자본을 포함한 무형자산이 세계 부(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보는 이유다.

이제 기본과 신뢰, 시스템 등 사회적 자본에 대한 대화를 서둘러야 한다. 지난해 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송년사로 SNS를 통해 널리 퍼진 글귀가 마음에 와 닿는다.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부족하고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소중한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더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더 모자란다.' 우리 국민 모두가 한 번쯤 깊이 되새겨봐야 할 갑오년 새해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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