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이 사회에 묻는다…'안녕들 하십니까?'

입력 2013-12-17 10:09:12

지역 대학가도 대자보 열풍…철도·송전탑·취업난 등 현실에 억눌린 불만 표

16일 경북대 교정 복지관 외벽에 학생들이
16일 경북대 교정 복지관 외벽에 학생들이 '안녕들하십니까'에 반박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이고 있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칼로 베이고 낙서로 훼손당한 대구대 내 대자보. 대구대신문사 제공
칼로 베이고 낙서로 훼손당한 대구대 내 대자보. 대구대신문사 제공

"다른 사람의 고통이라고 외면했던 그 고통들이 이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이들의 고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16일 오전 10시쯤 경산 영남대 종합강의동 1층 복도. 두 학생이 대자보를 붙였다. 대자보는 철도 노동자들과 삶의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밀양과 청도의 주민들, 취업난과 대학 구조조정 속 대학생들의 현실을 이야기했다. 이날 이 같은 내용의 대자보는 영남대 내 상경대와 법정대, 인문관, 종합강의동 등 모두 4곳에 걸렸다.

이달 10일 고려대 교내게시판 대자보로 촉발된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 갖기를 호소하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대구경북 대학가에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그동안 사회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대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반면 대자보의 주장에 반대하는 일부 학생들이 대자보를 훼손하거나 반박 대자보를 올리는 등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움츠렸던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

영남대 내에 직접 대자보를 써 붙인 김현진(21'여'영남대 서양화과) 씨는 "어릴 적에 외환위기를 거쳤고 부모님들도 먹고사는 문제에 급급해 자식들에게 안정된 직장을 갖기만 원했다"며 "사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쌓여왔던 사회 불만을 표현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씨는 "학생운동권이 쓰는 '승리'와 '투쟁' 같은 주입식 언어가 아니라 우리의 말로 우리의 현실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자는 뜻에서 의문 부호를 던졌다"고 했다.

같은 날 오후 4시쯤 대구 북구 산격동 경북대 복지관의 붉은 벽. 2~4장짜리 대자보 4개가 붙어 있었다. "자기만의 방에서 광장으로", "우리가, 우리의 가족이, 이웃이 고통받고 있는데도 정말 안녕들 하십니까?"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나가는 대학생과 학교직원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대자보의 글을 찬찬히 읽어갔다. 몇몇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옆의 친구들과 내용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최인지(20'경북대 사회학과) 씨는 "학생이 공부만 해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있지만 그동안 숨겨왔던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현상"이라며 "대자보 내용에 대해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만 철도 민영화는 생활과 밀접한 부분이기 때문에 공감이 된다"고 했다.

대구대에선 최근 4, 5곳에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주로 학생들이 자주 오가는 학생회관과 중앙도서관, 사회과학대 등지에 게시됐다. 대구대신문사 편집국장인 황래영(22'대구대 신문방송학과) 씨는 "지난 주말 대자보를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 뒤 많은 사람들이 응원 댓글을 다는 등 공감하는 분위기가 생겼다"며 "그동안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학생들이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대자보를 접한 대학생들은 사회문제뿐만 아니라 그동안 학과 통폐합 등 대학 내 구조조정 문제에 대한 불만도 표출했다. 한 학생은 대학 내 학과 통폐합을 비판하는 만평이 주간 교수에 의해 학생신문에 실리지 못하는 등 학생 스스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창구가 없어진 점도 지적했다. 또 정치적인 중립성을 지키자는 자체 검열과 정치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에 대한 반성도 나왔다.

16일 현재까지 대구대를 비롯해 계명대, 경북대, 영남대, 대구가톨릭대 등의 교내에 대자보가 걸렸다.

◆대자보 훼손, 내용에 대한 찬반 논란

하지만 일부 학생들이 대자보를 훼손하거나, 반박 대자보를 붙이는 등 대자보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표출되고 있다.

대구대에선 한 학생이 행정실에 불법 게시물이기에 떼어도 되느냐고 물어본 뒤 사회과학대 내 대자보를 찢어 인터넷 일베게시판에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또 학생회관의 대자보는 칼로 훼손하거나, 통째로 뜯겨 쓰레기통에 버려지기도 했다. 계명대에서도 학생들의 대자보가 붙었다 떼졌다를 반복했다. 대명동캠퍼스와 성서캠퍼스 사회대 건물 등 계명대 곳곳에 걸린 대자보가 16일 오후를 지나며 게시판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

대자보 내용에 대한 찬반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15일 경북대 경영학과 09학번 박모 씨라고 밝힌 한 학생이 교내에 반박 대자보를 붙였다. 박 씨는 "철도노조파업을 반대하고, 밀양 송전탑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찬성하면 깨어 있지 못한 대학생 취급을 받는다"며 "옳지 못한데도 지지하고 응원해야 합니까"라고 되물었다.

같은 날 오후 9시 30분쯤 인터넷 포털 다음 아고라에 박 씨의 글을 다시 반박하는 아이디 '자기주장'의 글이 올라왔다. 아고라의 이 글에는 "장차 서울역 몇 배의 성장잠재력을 갖춘 수서역을 특정 민간기업에 주는 것은 특혜"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올해 초 대구대 사범대학을 졸업한 김모(26) 씨는 "대학생이란 특정 세대나 집단의 문제만 보지 않았으면 한다"며 "고졸이거나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물론 나이가 지긋한 기성세대까지 공감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했다.

구춘권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취업과 학점, 스펙 경쟁에 내몰려 움츠러든 대학생들이 특정 단체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가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점은 고무적"이라며 "각 개인의 주장들이 정당과 사회단체 등의 정치 과정을 통해 사회'정치적인 압력을 만들어내야 정책과 법 등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서광호기자 kozm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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