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감독 여성배우가 만든 여성답지 않은 여성영화
한국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여성 감독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정향, 임순례, 변영주, 정재은, 홍지영, 이미연, 이경미 감독 정도가 고작이다. 이 가운데 세 편 이상 연출한 감독은 앞의 네 감독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인가? 여성 감독이 영화계에 많이 진출하면 섬세하고 감성적인 영화가 많아져 다양한 영화를 관객들이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영화라는 매체의 목표가 관객의 감성을 극적으로 자극하는 것이라면, 여성 감독이 남성보다는 더 유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여성 감독이 많아지면 여성 문제를 여성 시각에서 다룰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방은진은 천생 여성 감독이다. 이 말은 그녀가 여성 문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다는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배우 출신의 감독이라는 것이다. 임권택, 박철수, 김기덕 등 유수의 감독 영화에 출연하다가 연출로 방향을 선회해 현재 개봉하고 있는 '집으로 가는 길'까지 총 세 편의 장편을 연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은진이 배우에서 감독으로 범위를 넓힌 것이 아니라 아예 방향을 선회했다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배우 생활은 거의 하지 않고 감독에만 치중한다는 말이다. 올해 박중훈과 하정우, 유지태가 감독 시도를 했다가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감독 인생은 쉽지 않은데, 방은진은 오로지 감독으로 전력투구해 지금으로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그녀가 여성 감독이기 때문에, 여성의 아픔을 잘 다룬 영화를 만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방은진은 장편 데뷔작 '오로라 공주'부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오로라 공주'는 매우 '센' 영화이다. 이토록 센 영화를 이후 한국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딸이 성폭행당한 후 죽었다.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엄마는 딸을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하나씩 살해한다. 이 영화에서 방은진은 남성의 무능과 여성의 직접적인 살해가 왜 행해져야 하는지, 뚜렷하게 말한다. 더불어 초보 감독의 연출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용의자X'를 보면서 나는 방은진이 연기자들, 촬영감독 등과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자체가 그렇게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매우 적절하게 이야기가 흘러가 별다른 흠을 잡기 어렵다. 이요원, 류승범, 조진웅, 이 세 배우가 펼치는 연기가 강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살해와 추적, 도피의 지적 게임이 그럴듯하게 펼쳐진다. 나에게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미묘한 감흥이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가 '용의자X'였다.
두 편의 성공을 배경으로 방은진은 '집으로 가는 길'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남편 후배의 심부름으로 비행기를 탔다가 마약 사범으로 잡혀 2년 동안, 멀고 먼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에 갇혀 있다가 돌아온 이야기. 어떻게 보면 공무원의 무능과 남편의 무능을 슬쩍 비틀면서 고발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형적인 여성영화이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이야기. 그 고통을 이겨내고 결국에는 성취하고야마는 인내의, 눈물 나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도연의 연기이다. 지금 한국영화계는 류승룡, 황정민, 하정우, 송강호가 주류를 이루는 남성 배우 전성시대이다. 이에 비해 여성 배우는 쉽게 찾기 어렵다. 주연으로 꼽을 만한 배우도 많지 않고, 연기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배우도 몇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전도연은 '집으로 가는 길'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십분 증명해 보였다. '밀양'에서 다소 힘이 들어갔던 연기에 현실감을 더해,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애절한 마음을 캐릭터로 담아냈다. 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배우 전도연보다 극중 캐릭터가 살아났다.
물론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은 방은진이다. 감독 방은진이 연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끌어낸 것인데, 아마도 방은진이 꾸준히 여성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방은진이 만든 영화에는 여성이 살아 있다. 남성은 무능해서 딸의 죽음에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거나, 보증을 잘못 서 가산을 탕진한 후 아내를 먼 이국의 감옥으로 보내야 하거나, 아내에게 돈을 뜯으러 왔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에 비해 여성은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무척이나 사랑했던 딸이 죽자 스스로 복수를 감행하고,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집에 찾아온 남편을 살해하며, 남편을 대신해 스스로 돈을 벌러 떠난다.
방은진의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여성 감독이 만들고 여성이 주인공이지만, 영화 내용은 결코 감성적이거나 신파적이거나 달콤하지 않다는 것이다. 방은진의 영화는 처절한 아픔과 고통이 있고, 그 아픔과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독한 생존 방식이 있다. 심지어 참혹한 복수를 행하기도 하고, 남편을 자신이 직접 죽이기도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부장 사회의 남성들의 폭력에 대한 복수인가, 아니면 남성들의 폭력과 무능에 에워싸여 살아가는 여성들의 고군분투기인가? 방은진은 이 지독한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묻고 영화적으로 답한다. 이 때문에 이 영화의 흥행이 몹시 궁금하다. 여성들은 과연 어떻게 답할 것인가?
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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