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는 선비정신 心山 김창숙] ⑪혼돈과 분열

입력 2013-10-26 07:32:05

"민족 단결 시급하다"…해방정국 난립한 정당들 권력 다툼 개탄

둘째 아들 찬기가 중국 충칭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창숙이 자신의 슬픈 마음을 적어놓은 글 사진 제공 : 성균관 대학교
둘째 아들 찬기가 중국 충칭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창숙이 자신의 슬픈 마음을 적어놓은 글 사진 제공 : 성균관 대학교
27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에 참석한 김창숙(1946.4.11. 둘째 줄 왼쪽에서 7번째) 사진 제공 : 성균관 대학교
27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에 참석한 김창숙(1946.4.11. 둘째 줄 왼쪽에서 7번째) 사진 제공 : 성균관 대학교

독립운동 시절 심산은 한국을 강점한 일본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한반도를 통치하는 일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그의 여러 행동들에 일관되게 나타났다. 심산은 한국을 강점한 일제의 모든 행위를 부정한 대신 독립의 집념을 꺾지 않았다. 중국 망명 시절 일제의 압박과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제의 법정에서 일본 법률을 부인하고 변호사를 거절한 것이나 일제 감옥의 관리들에게 절하지 않은 점 등은 한국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일본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심산은 유학자이자 문장가였다. 그러나 결코 고담준론을 펴는 고리타분한 유학자가 아니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실천가였다. 대궐 앞에 나아가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기도 했고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라며 한일합방론을 펼치는 일진회 일당들을 처벌하라는 건의서를 중추원에 내기도 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의 대표들이 빠진 것을 부끄럽게 여겨 조국 독립을 갈망하는 유림의 뜻을 모아 형극의 망명길에 나섰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가 펼쳐진 가운데 심산은 직접 고국에 들어와 독립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 모금에 나섰고 나석주 의사에게 민족의 잠자고 있는 혼을 일깨우도록 했다. 대쪽 같은 선비 심산은 선비로서의 의무를 앞장서서 실천한 행동가였다. 가정과 가족의 안위조차 돌보지 않고 나라의 독립을 추구한 그는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의 단합이 절실하다고 여겼다. 분열하고서는 외적과의 싸움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자각한 것이다. 임시정부에 대한 해외 동포들의 불만이 쌓여 창조와 개조 두 방안을 놓고 갈등을 빚을 때 심산은 일송 김동삼에게 "창조로 분열하여 홧덩이를 빚기보단 화합하여 개조함이 낫다"는 소신을 밝힌 바 있다. 단결하고 화합해야 독립의 길을 열어 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심산이었지만 민족이 갈기갈기 찢어지고서는 외적을 물리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정당의 난립

해방된 심산에게 다가온 국내 상황은 분열 그 자체였다. 날이 새면 정당이 무더기로 생겨나고 서울 거리에는 저마다 애국지사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를 막론하고 나라의 장래를 책임지겠다는 무리들이 파당을 나누고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아직 일본의 무장도 해제되지 않았고 미군도 임시정부도 들어오지 않은 무정부 상황에서 한반도는 분열과 혼돈으로 치닫고 있었다.

심산이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운형이 찾아와 건국준비위원회의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각 파별로 정당이 난립해서 그 수가 60여 개에 이르고 공산당은 그들대로 박헌영 파와 이영과 정백 등이 주도한 조선공산당이 대립하고 있다고 했다. 심산은 "듣고 있자니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먼저 상경한 영호남의 친구들도 민중당이란 정당을 조직해서 그에게 당수 자리를 맡아달라고 재촉했다. 장차 정권을 장악해서 나라를 운영해보자는 그들을 향해 심산은 말했다.

"국가와 강토는 아직 수복되지 못하고 정식 정부 수립을 보지 못한 이때에 정당의 난투가 이처럼 치열하니 저 60여 개의 당이 만약 정권과 정책을 다툰다면 신흥 대한민국이 필경 저들 손에서 다시 망하고 말 것이다. 나를 당수로 추대하나 나는 허영에 움직여서 당수의 자리에 앉아 여러 정당과 싸움질을 하여 몸을 망치고 나라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친구들은 "정당을 혐오하여 손잡기를 싫어한다면 무엇 하러 서울에 왔나. 차라리 고향에 돌아가서 문을 닫고 누워 있으라"며 공박했다. 그러나 친구들이 성내고 졸라도 '난립하여 조국의 완전한 독립에의 꿈과 희망을 그르칠 수 없다'는 그의 소신은 변하지 않았다. 심산의 거절에 발을 끊고 절교했던 친구들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당을 탈퇴하고 심산의 말이 옳았다며 다시 찾아왔다. 아직 일본의 무장도 해제되지 않았지만 권력을 향한 대열에 앞다투던 그들도 분열과 난립의 혼돈 중에 난무하는 권력에의 헛된 망상을 뒤늦게나마 자각한 것이다.

해방 후 한 달도 안 된 9월 초순 여운형 박헌영 허헌 등이 공산당원 등과 비밀회의를 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창립을 선포하고 주석 이하 모든 부서를 결정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날이었다. 한반도에 상륙하는 미군에게 조선인들이 만든 정부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며 급조한 것이었다. 휴양하며 두문불출하던 심산은 이들의 소식을 듣고 '정권을 잡기 위해 비밀리에 천명도 안 되는 무지한 시민을 모아 놓고 정식 정부라며 국민을 기만한 죄는 죽임을 당해도 싸다'고 개탄했다.

◆이승만과의 회동

얼마 후 이승만이 귀국했다. 그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이승만은 단체의 대표증을 가지고 오는 경우에만 만나겠다고 했다. 400여 개의 단체가 급조됐다. 기껏해야 대여섯 명이 모여 만든 게 많았고 두세 명이 만든 단체도 적잖았다. 심지어 혼자서 단체를 만들어 대표라고 한 이도 있었다. 심산의 친구들도 이승만을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굳이 이승만을 만나 볼 이유나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곧 심산이 이승만을 만날 이유가 생겼다. 장차 조선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외신보도 때문이었다.

심산의 우려와는 달리 이승만은 신탁통치 건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 미국정부가 확정한 정책이 아니란 것이었다. 대신 이승만은 심산에게 건국사업에 가장 긴요한 것은 재정이라는 의외의 말을 했다. "당신은 필요할 때 재력을 동원할 수 있는가"라는 이승만의 물음에 심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수많은 정당이 난립하여 서로 다투고 있다. 현재 시급한 일은 민족의 단결이다. 자금의 마련은 그다음 문제다. 단결하지 않고 돈에만 의지한다면 싸움을 더하게 만들 뿐이다." 심산은 돈도 없이 무슨 정치를 하느냐는 이승만의 충고 아닌 충고에 실망했지만 회동 후 친구들에게 돈 이야기는 말하지 않았다.

후일 이승만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승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친일파 부자들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는 이승만이 자신의 돈줄을 보호하기 위해 입에 달고 다닌 말이라고 비난했다. 심산과 이승만은 단결이란 말을 똑같이 즐겨 썼다. 그러나 말만 같을 뿐 두 사람이 생각한 단결의 이유와 목적은 같지 않았다. 민족의 단결에 대한 생각이 다른 만큼 둘의 향후 관계는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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