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식민지시대의 동요음반(하)

입력 2013-09-26 14:36:37

홍난파에게 배운 서금영, 은은한 창법으로 사랑받아

이정숙에 이어서 그 다음 위치를 차지하는 2위 동요가수로는 서금영이 16곡, 김숙이가 15곡, 그리고 녹성동요합창단이 12곡, 최선숙이 11곡, 진정희와 이경숙이 9곡, 김순임과 계혜련이 8곡, 강금자가 6곡, 신카나리아와 최명숙이 각각 5곡, 전명희, 이삼흥, 송보선, 신흥동인회가 각각 4곡씩 발표했습니다.

이정숙은 서금영과 함께 유명작곡가 홍난파로부터 동요창법에 대한 특별지도를 받았습니다. 1926년 7월 15일, 경성라디오방송국이 체신국 방송소를 이용해서 전파를 송출할 때 여기에 최승일과 함께 출연해서 유행가 '곤돌라' 등을 불렀습니다. 배우 신일선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주제곡도 이정숙이 처음 부른 것으로 증언합니다. 1927년 9월에는 장충단에서 열린 시민위안 추석놀이 음악영화대회에 단성사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기도 합니다. 동요가수 이정숙의 생몰연도를 확인할 자료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음으로 손꼽을 수 있는 동요가수로는 서금영(徐錦榮'1910∼1934)입니다. 그녀는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전당포를 운영하던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옮겨와서 살았습니다. 1925년 동아일보 신년호에는 서울의 보통학교 재학생 중 장래가 촉망되는 아동 140명을 선발해서 특집을 꾸몄는데, '장래의 문학가'에는 교동보통학교의 설정식과 윤석중이 여기에 뽑혔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자라서 예측대로 명망 높은 시인이 되었습니다. '장래의 음악가'에는 동덕여자보통학교의 재학생 서금영이 선발되었지요. 이뿐만 아니라 수재 아동의 가정을 소개할 때 '창가 잘하는 아가씨'로 서금영에 대한 취재기사가 실렸습니다.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이정숙이 다녔던 중앙보육학교로 진학했는데 재학시절 이미 이름난 동요가수로 여러 무대에 올랐습니다. 1931년 중앙보육학교 졸업생 명단에 서금영의 이름이 보입니다. 같은 해 이화여전 졸업생 명단에 시인 모윤숙의 이름이 보이는 것을 보면 그와 동년배쯤 될 것입니다. 서금영도 이정숙과 마찬가지로 홍난파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창법 지도를 받았던 제자였습니다. 1931년 1월 '바닷가에서' '무명초' 등이 취입된 첫 음반을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뒤 1934년 6월 '해바래기' '봉사꼿'까지 내리닫이로 10여 곡 이상을 취입하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콜럼비아를 주무대로 하면서 리갈, 이글, 닙본노홍 등 여러 레코드사에서 초빙을 받아 다양한 음반들을 발표했지만 그해 여름 장티푸스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당시 서금영의 나이는 불과 23세였습니다.

홍난파는 서금영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1931년 홍난파의 질녀 홍옥임이 동성애에 빠져서 파트너와 함께 열차에 투신자살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 쇼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아끼던 제자 서금영의 사망소식을 접했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되는 절창 '봉선화'가 빚어졌다고 하는군요. 노래 속의 봉선화는 질녀이기도 했고, 요절한 제자 서금영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서금영의 대표곡 '달마중' 1절)

우리들의 어린 시절,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정숙과 서금영을 비롯한 옛 동요가수들의 노래는 한 세기의 세월을 껑충 뛰어넘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 심금을 울리게 합니다. 두 사람의 음색과 창법을 비교해보면 이정숙은 서금영에 비해 한층 낭랑하고 또랑또랑한 울림으로 펼쳐집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서금영의 음색과 창법은 나직하고 은은함이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가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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