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4부-가톨릭 의료사업 <4>대구파티마병원 개원

입력 2013-09-23 07:48:01

1956년 6·25촌에 문 열어…6개월간 4천 명 몰려 북적

1967년 동대구역 쪽에서 바라본 파티마병원의 전경. 당시만 해도 인근에서 병원이 가장 큰 건물이었다. 대구파티마병원 제공
1967년 동대구역 쪽에서 바라본 파티마병원의 전경. 당시만 해도 인근에서 병원이 가장 큰 건물이었다. 대구파티마병원 제공

파티마의원이 개원한 1950년대 중반 대구시 동구 신암동은 도심과는 거리가 먼 동쪽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특히 6'25전쟁의 후유증이 극심한 동네였다. 당시 파티마의원 뒤편에는 '6'25촌'으로 불리는 곳이 있었는데, 의지할 사람 한 명 없는 가난한 피란민들이 제대로 정착할 곳조차 없어 떠돌고 있었고, 의료혜택은 꿈도 꾸지 못했다.

◆가난한 피란민들, 무료진료소에 몰려

이곳에 지은 단층 건물의 무료진료소에는 늘 가난한 환자들로 붐볐다. 무료진료소에 오면 외국에서 온 구호품으로 밀가루, 우유, 독일제 종합 비타민 등을 배급해 주었다. 무료진료소 초기에는 오트마라 수녀와 함께 독일 툿찡 베네딕도회 모원에서 파견된 외국 수녀들이 도와주었다. 1957년 12월 독일에서 다시 한국에 파견된 프리텔마 수녀가 책임자로 일을 했다.

처음 베네딕도수녀회가 남한으로 내려온 뒤 세운 수녀회 분원은 중구 공평동에 있었다. 분원의 주보 성인(수호자라는 뜻으로, 지키며 보호해주는 성인)은 성 안토니오였다. 맨 처음 세웠던 무료시약소를 '안토니오의원'으로 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동구 신암동으로 옮겨서 새로 시작하는 의원에는 새 이름을 붙여야 했다. 이전 계획을 의논하면서 새 의원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던 중에 당시 중구 삼덕동 본당의 전교회 정행록 회장이 파티마 성모상을 기증하게 됐다.

그 무렵에는 파티마 성모를 공경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의원을 파티마 성모에게 봉헌한다는 의미로 파티마의원이라고 정했다. 게다가 새 의원이 가까운 곳에 있는 신암동 성당 건물의 꼭대기에도 파티마의 성모상이 있었다. 의원 이름을 파티마로 정하는 것이 숙명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파티마(Fatima)는 포르투갈의 한 동네 이름이다.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까지 매월 13일에 성모가 파티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모는 세계 평화, 특히 러시아의 공산주의 전쟁을 막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라고 했다. 그후 환자들에게 치유 기적이 일어났고, 성모 발현이 기적으로 판명돼 세계적 순례지가 됐다.

◆1956년 파티마의원 개원

파티마의원 건축은 1955년 1월 28일 시작돼 여름에 공사를 마쳤다. 6월 21일 오트마라 암만 수녀를 비롯한 대부분 수녀들은 공평동 분원에서 나와 신암동으로 옮겨간 뒤 1년 남짓 개원을 준비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의사 확보였다. 오트마라 수녀는 독일 툿징의 모원에 의사 수녀 파견을 요청했고, 1955년 9월 4일 독일인 마리아 살루스 수녀가 한국으로 왔다.

살루스 수녀는 먼저 미국에 가서 베네딕도회 소속 병원을 돌아봤고, 한국에 와서는 의사시험을 준비했다. 한국에서 인정하는 의사 면허증 없이는 의원에서 진료를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서둘러 한국에 왔고, 1956년 1월 부산에 있던 독일 적십자병원에 머무르며 한국 의료를 익혔다. 한국어를 열심히 배운 살루스 수녀는 의사면허 국가고시에 합격해 1956년 6월 면허를 받았다.

살루스 수녀는 의원을 짓고 개원을 준비하는 1년간 약을 준비하면서 한국말도 더 익혔다. 한편 이종원 수녀가 청원기(수녀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 수녀로서 의사 면허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구에 오게 됐다.

이렇게 의사가 확보되자 1955년 초에 건축을 시작한 지 1년 6개월 만인 1956년 7월 2일 파티마의원을 개원했다. 건평 456㎡에 내과, 소아과를 갖추고 무료진료소도 함께 신설됐다. 초대 의원장에 마리아 살루스 수녀가 취임했다.

◆환자들 몰려든 파티마의원

개원 초기에는 따로 병실이 없었다. 1층에는 내과, 소아과, 검사실, X-선실, 접수 및 수납이 있었고, 2층은 수녀원과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리아 살루스 수녀가 내과, 이종원 수녀가 소아과 진료를 맡았다. 간호사인 이화련 수녀는 접수'수납과 약국 업무를 담당했고, 이름힐데 수녀는 검사실을 맡았다.

개원하자마자 예상보다 많은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여름에 개원한 뒤 연말까지 6개월간 찾아온 환자만 4천63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외래환자는 3천536명이었고, 무료진료소 환자는 527명이었다. 이처럼 환자가 몰리자 병원 일손이 부족해졌고, 수녀원의 수녀들은 거의 대부분 병원에서 봉사했다.

초대 의원장을 맡았던 마리아 살루스 수녀는 건강이 나빠져 1년 뒤인 1957년 7월 29일 독일로 떠났다. 제2대 파티마의원장은 오트마라 암만 수녀가 맡게 됐다.

살루스 수녀가 맡고 있던 내과 진료를 위해 의사를 새로 영입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 의사가 그리 많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대구시내에 있던 성누가의원의 임학권 원장이 파티마의원의 실정에 꼭 맞는 의사를 영입하기 위해 경북대병원에 가서 협조를 구했고, 김재하가 초빙돼 왔다. 김재하는 파티마병원 직번 1호로 초창기 유일한 일반인 의사였다. 10여년간 하루 1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봤고, 무슨 일이라도 도움을 청하면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1962년 파티마병원 개원

파티마병원은 1962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됐다. 현대식 3층 건물을 새로 짓고, 진료과도 늘리면서 파티마의원이 병원으로 바뀐 것이다. 1959년 원조 단체인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에서 "대구에 가톨릭병원을 설립하려는데, 베네딕도 수녀회가 맡아서 할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당시 오스트리아에 머물고 있던 대구교구 서정길 주교가 대구에 가톨릭병원을 세울 뜻이 있다며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에 요청하자 이런 문의가 온 것이다.

베네딕도 수녀회는 병원 증축 문제를 논의 중이었는데,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병원을 확장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대다수 의견이었다. 자금도 없고, 무엇보다 의사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겔트루드 링크 수녀는 "다른 것은 내가 다 책임질테니 시작해 보자"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결국 1959년 공사를 시작해 1961년 완공됐는데, 곧바로 개원하지는 못했다. 의원에서 병원으로 승격하려면 의료진을 확보해야 하고 의료기기를 갖추는 등의 준비가 필요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중 1961년 7월 미국에서 메리 액네스 수녀가 왔다. 첫 미국인 수녀인 액네스 수녀는 방사선 기사로 병원에서 근무하기 위해 파견됐다.

그리고 약사인 시그린데 수녀가 1962년 7월 독일 툿찡 모원에서 대구에 왔고, 1964년 8월 샨탈 수녀가 입국해 방사선과와 서무과에서 근무했다. 샨탈 수녀는 한국으로 파견된 마지막 수녀가 됐다.

1962년 8월 22일 파티마병원 증축 개원식이 열렸고, 초대 병원장에 에델트루드 와이스트 수녀가 취임했다. 1956년 개원한 파티마의원은 6년 만에 종합병원인 파티마병원으로 발돋움했다. 70개 병상을 갖췄고 진료과목은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마취과, 방사선과, 임상병리과 등 8개 과로 늘었다. 개원일부터 연말까지 환자는 외래환자 3만4천590명, 무료환자 8천477명에 이르렀다. 입원환자는 191명이었는데, 이듬해 입원환자는 1천269명으로 늘어났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