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트루트 수녀 한국 사랑, 파티마 종합병원 '주춧돌'

입력 2013-09-23 07:51:11

대구파티마병원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겔트루트 링크 수녀. 대구파티마병원 제공.
대구파티마병원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겔트루트 링크 수녀. 대구파티마병원 제공.

겔트루트 링크 수녀는 지금의 한국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와 대구파티마병원이 있도록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1933년 5월 2일 독일 툿찡 베네딕도 수녀회 모원에 입회한 뒤 4개월 만인 그 해 9월 15일 원산 수녀원으로 파견됐다.

한국인들과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한 것은 한국인의 심성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힘든 시기를 거치며 어려움도 많이 겪었지만 한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이해를 갖게 됐다. 자신을 스스로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했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는 바람에 강제수용소에서 고난을 받은 뒤 추방돼 툿찡 모원으로 돌아갔다가 1956년 5월 7일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신암동에서 수련장에 임명됐으며, 밤 늦도록 독일에 있는 지인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써서 도움을 청했다.

겔트루드 수녀 덕분에 1957년 9월 27일 병원 건물 2층에 성당을 건축했고, 1962년 8월 22일 종합병원으로 승격할 수 있도록 3층 건물을 증축할 수 있었다.

1967년 로마 총회에서 총장 수녀로 선출되면서 제2의 고향인 한국을 떠나야했다. 1982년 총장 임기를 마친 뒤 1983년 멀리 브라질 소로카바로 가서 1989년까지 한국 이민자들을 위해 봉사하기도 했다. 1989년부터 독일 툿찡으로 돌아가 성 베네딕도 집에서 10년간 살고, 1999년 3월 27일 90세로 선종했다.

고난의 땅인 북한을 그리워했고, 남한의 신암동을 사랑했으며, 한국을 사랑한 그는 이 땅에 묻히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국에서 눈을 감았다.

저서로는 북한 강제수용소 생활을 겪으며 쓴 시 '암흑과 폭풍 속의 너 영혼아!'가 독일어로 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우리말로 번역됐다. 은퇴 후 출간한 자서선 '하느님이 함께 하신 나의 생애'는 독일어로 출판된 뒤 영어와 한국어로 번역됐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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