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60주년 기획으로 납북화가 '임군홍'전이 22일까지 대백프라자 갤러리에서 열린다. 임군홍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이라는 흉포한 근대사 속에서 뚜렷한 자기세계를 구축하고, 신문화 수용과 보급을 통해 예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고 했다.
서양화라는 새로운 미술양식을 독학으로 공부했으며, 몇 차례 개인전과 미술을 활용한 광고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예술적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서구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함과 동시에 전통문화와의 융합을 꾀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의 정치적 갈등과 분단 속에서 그는 납북화가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당시 수많은 예술인들이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혼란에 희생되었던 것처럼 임군홍 역시 갈등과 혼동의 세월 속에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임군홍은 20세기 한국현대사가 빚어낸 예술적 비운의 전형이다. 일본의 간섭과 억압이 싫어 1939년 중국 여행길에 올랐던 그는 만주에 정착해 미술광고사를 운영하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쳤다. 당시 그는 북경과 만주 일원의 고궁 및 역사유적지와 중국적인 도시풍경, 중국 서민의 삶 등을 열심히 그렸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해 중국에서 제작한 작품들로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혼돈의 해방공간과 6'25동란 속에 납북되고 말았다.
북한에서는 문화선전성 소속으로 선전화를 그렸으며, 무대 미술 및 영화 촬영소의 의상 디자인을 창작하기도 했다. 1961년까지는 조선미술가동맹 개성시 지부장을 역임했다. 그 후에는 함경북도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조선화 기법을 익혀 조선화가로 활동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탓에 그의 생애와 작품들은 우리 역사 속에서 잊히고 말았다.
임군홍은 색채감이 뛰어난 작가였다. 그는 소재에 따라 적합한 색채를 적절하게 구사했다. 인물화에서는 대체로 절제된 화면구성과 단색조의 색채를 구사했고, 중국의 거리, 노점상, 뒷골목 풍경 등 일반 서민들의 삶을 형상화할 때는 거기에 어울리는 어둡고 칙칙하고 둔중한 색채를 구사했다.
이번 임군홍전은 1997년 갤러리 도울 기획 전시 이후 16년 만의 전시로, 작가가 1937년 제16회 조선미전에 출품했던 작품 '모델'을 비롯해 제20회 조선미전에 출품했던 '노점', 그리고 북경과 만주 일원의 고궁을 그린 풍경화, 1940년대 중국 거리의 풍경을 그린 '행상', 북해공원 등 30여 점의 유화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또 화가 김혜일과 함께 개최했던 '양화 2인전 포스터' 등 유품과 1930년대와 40년대 각종 전시 팸플릿, 편지, 화구 등을 통해 임군홍의 예술적 세계와 삶의 세계를 동시에 되짚어 볼 수 있다. 혼돈과 망각의 세월 속에 잊고 있었던 근대화단의 거목을 찾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19, 20일 휴관. 053)420-8015.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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