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내란 예비 음모'라는 말 때문에 나라가 떠들썩하다. 그 말이 풍기는 음산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보면서 문득 십여 년 전 지리산에서 나도 참가했던 어떤 '예비 음모'를 생각했다.
2000년 가을, 지리산 골짜기. 배낭을 짊어지거나 가방을 둘러멘 젊은이들이 속속 모여든다. 하나같이 결연한 표정이다. 악수를 건네며 나누는 인사도 예사롭지 않다. "대구경북, 결심했습니다. 부산울산경남, 마찬가지입니다. 광주전남, 행동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전북, 분명히 함께합니다."
뭔가 결사(結社)를 하려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누군가는 자료를 배포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책자를 내밀기도 한다. "국가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국가라는 존재에 대해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곳도 아닌 지리산, 여기에서 '국가'라는 존재에 대해 그동안 가졌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이 모임의 정체는 도대체 뭔가? 반국가단체 '예비 음모'인가?
어떤 '예비 음모'였던 것은 맞다. 그러나 이 예비 음모는 내란 모의도, 반국가단체 준비도 아니었다. 이 모임은 지방분권운동을 조직하기 위한 '예비 음모'였다.
우리는 이 모임에서 "국가가 먼저고 지방이 나중이 아니라 지방이 우선이고 국가는 지방이 모여서 함께 해야 할 일, 지방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는 '사상 학습'을 했다. 이것을 유식한 말로 '보충성 원칙'(Subsidiarity Principle)이라고 한다는 이론적 무기도 얻었다. "지방은 국가가 나누어주는 것이나 받아먹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중앙정부는 지방정부가 수행할 수 없는 사무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방정부에 이양해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국가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21세기 '전환 시대의 논리' 앞에 우리는 전율했다.
이 '예비 음모'는 2001년 여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사상 학습, 이론 무장, 조직 준비도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결국 이 모임은 2001년 9월 3일 전국의 지역 지식인들이 우리나라의 초집중적 국가 체제의 현실을 걱정하면서 지방분권운동의 필요성을 제안하는 '전국 지역지식인 선언'의 발표로 이어진다. 이 선언은 지방분권운동을 조직화하도록 했다. 이듬해인 2002년 4월 13일,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 결성을 시작으로 각 지역에서 지방분권운동 조직이 만들어졌고 2002년 11월 7일, '지역균형발전과 민주적 지방자치를 위한 지방분권국민운동'이라는 전국 결사가 이루어졌다.
이 '예비 음모'에 끼었던 인연으로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 초대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나로서는 십여 년 전 지리산 결사의 감회가 새롭다. 그로부터 정부는 세 번이나 바뀌었는데 우리는 무엇을 이루었나? 노무현정부 때는 특별법을 만들어 권한 이양도 하고 균형발전을 위해 공공기관 지방 이전 같은 분산 정책도 했다. 그리고 정부 이전 때문에 나라가 뒤집어지는 것 같은 난리도 겪었다. 그런데 이명박정부에 들어와서 '시장친화적 균형발전'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더니 '지방'은 중심 의제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지방분권 개헌'이 필요하다고 지방분권운동에서 이 캠프 저 캠프의 문을 두드렸는데 하나같이 시큰둥했다. 취득세 문제로 지방재정에 고민거리가 생겼는데 이 논의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기초자치 정당공천제 폐지도 할 듯 말 듯 애간장을 녹이고 있다.
새로운 '예비 음모'가 필요하다. 누구 뒤나 따라다니는 찌질한 '예비 음모'가 아니고, 뒷방에서 노닥거리다가 그건 농담이었다고 하는 실없는 '예비 음모'가 아니라 국가를 분권적으로 재구조화하는 당당한 '예비 음모'를 한 번 더 하자. 지방분권운동의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 제2지방분권국민운동선언대회가 얼마 전 광주에서 열렸다. 세 가지 과제를 가지고 새 출발을 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지방재정, 정당공천제 폐지, 자치역량 강화.
2000년 가을, 지리산의 '예비 음모' 때처럼 지방 언론, 학계, 시민사회가 다시 한 번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
김태일/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