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칼럼] 이석기에 휘둘리는 나라

입력 2013-09-02 11:24:35

국정원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해서 내란 음모 혐의로 압수수색을 친 날은 묘하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10대 그룹 회장단과 청와대 오찬을 하던 날과 겹쳤다. 하반기 경제 활성화와 민생 안전에 최대 주안점을 두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역대 최대인 124조의 현금을 재어놓고도 투자를 망설이는 10대 그룹 회장단을 설득해서 선투자를 요청하고, 규제 개혁에도 머리를 맞대는 시간이라 이슈 거리로는 충분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무실 등에 대한 내란 모의 혐의 압수수색 소식에 묻혔다.

이날 압수수색은 남북 대치 상황에서 진보로 위장하고 간첩질하거나 자생적인 빨갱이가 된 이들을 잡아내는 게 본분인 국정원장이 시시한 댓글 사건에 휘둘려 운동권 출신 현직 검사로부터 매카시즘이라고 추궁당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현직 국회의원의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하려면 국회에 미리 보고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국정원이 압수수색팀을 현장에 보내고도 이석기 의원 사무실에서 중요 문건이 파쇄되는 것을 보면서도 중지시키지 못한 것은 국회 동의를 늦게 받아서였다. 그만큼 국정원의 이석기 의원에 대한 압수수색은 급박하게 집행됐다.

그날, 이석기 의원 사무실에 대한 전격 압수수색은 국정원의 수사 낌새를 챈 저들이 일부 잠적하는 등 이상 기류를 보여 급박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의 압수수색을 받자 통진당 관계자는 계속 말을 바꾸며 초점을 흐리고 있다. 28일 압수수색이 이뤄지자 이정희 통진당 대표는 '용공 조작극'이라는 매카시즘을 들먹였고, 통신 시설'유류 저장고'철탑 등 국가 기간 시설 파괴 계획 보도는 모략극이자 날조라고 밀어붙였다. 김재연 의원은 "국정원 녹취록은 사실이 아니다, 모임이 없었다"고 거짓말했지만, 녹취록과 동영상이 나오자 홍성규 대변인이 그날 모임을 이석기 의원 초청 정세 강연이라고 둘러댔다. 이석기 의원은 민망하게 자신을 뼛속까지 평화주의자로 규정지었고, 이상규 의원은 1일 국정원이 수원에 사는 큰 빚 진 당원을 거액으로 매수하여 문건을 확보한 프락치 공작이라며 역공에 나섰다.

공안 당국이 파악한 통진당의 지하 혁명 조직 RO는 이석기 의원을 총책으로 경기 지역에 4대 권역별 지휘책이 자금 조달, 미군 사격장 폐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 주도, 좌파 결집체 진보연대 활동 등 고유 업무를 맡았다. 외국으로 나가는 통신 시설 파괴, 전력 차단 시 방송'라디오'통신의 자가 발전 매뉴얼, 평택 유류 시설 파괴 등을 다지는 이들의 모임 장면은 북한 특수부대들이 후방 교란 시 쓰는 수법과 유사하다.

북한의 지령을 받는 이적단체(민혁당) 활동으로 유죄를 받았던 이석기를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것은 노무현정부 시절 사면복권에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이 표를 모으기 위해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를 한 탓이다. 야권연대로 지역구를 양보받은 통합진보당의 이석기는 민주당이 펴준 길을 따라 비례대표로 당당하게 국회 입성했다. 국회에 입성한 이석기 의원은 거의 입법 활동도 하지 않다가 비난 여론이 일자 종편 관련 법안 등을 내면서 미군기지 이전, 방위비 분담금, 전시작전통제권 등에 대한 자료를 20~30건이나 요청했다.

2004년 노무현정부 때 지하 혁명 조직 RO를 결성하고 두 차례나 방북했던 이석기 의원은 '북은 다 애국이고, 남은 다 반역'이라며 전쟁을 정치 군사적으로 준비하자고 꽂혀 있는 사람이다. 이런 이석기를 원내로 끌어들인 민주당은 체포동의안을 즉시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맹목적 북한 추종자를 국회의원이 되도록 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고, 영원히 수권 정당이 되려는 꿈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한동안 민주화만 되면 모든 것이 다 나아질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온 날들이 있었다. 소위 민주화라는 구호에 모든 것을 걸었던 '순수의 시대'에 대한 환상은 지금 여지없이 깨지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두 좌파 대통령의 10년 집권기를 거치면서 국정원의 북한 내 정보망인 휴민트는 와해됐고, 종북좌파가 3천400명이나 사면복권됐다. 주체사상이 우리 사회 양지에 발 디딜 틈을 준 게 아닐까 싶다. 요새 학회에서도 민간에서도 '나는 막시스트'라는 말을 자랑삼아 하는 풍조가 우리가 피 흘려 이뤄온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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