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 향 가득한 국내 유일 왕자태실 군집지 '고고씽'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후부터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듯한 착각에 빠져 사는 것이다. 이런 착각 때문인지 자전거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여행 떠날 준비를 한다. 이렇게 변한 것에 대해 스스로 놀라기도 하지만 나는 자전거 여행이 좋다. 페달을 밟는 순간 행복해진다.
이번 여행은 노란 참외가 있는 성주다. 성주는 참외의 고장답게 비닐하우스가 가는 곳마다 보인다. 아직 수확이 덜 끝난 하우스에는 참외가 익어가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사적 제444호인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이다. 선석산 아래 위치한 이곳은 태봉(해발 258.8m)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종대왕의 장자 문종을 제외한 전 왕자의 태실과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조성한 태실 등 모두 19기가 묻혀 있다. 태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도록 두 줄로 왕자의 이름을 기록해두었기에 확인하기가 쉬웠다.
해설자는 1977년 정비사업 때 도자기류 4점과 지석(誌石) 3점의 유물이 출토됐다고 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군집을 이룬 유일한 곳이며 조선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 연구에 자료가 되고 있다고 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의 태실 조성 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다만 단종과 금성대군의 태실이 소실돼 터만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주차장에서 태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돌계단이 참 예뻤다. 주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그늘을 만들어준다. 계단에 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씻어준다. 소나무 향기가 허파 깊숙한 곳까지 전해진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태봉은 길지다. 기가 모여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차분해지고 편안해진다. 잡념까지 사라진다. 그곳에서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조금 떨어진 한개마을로 향했다. 성주군 월항면 다신1리에 위치한 한개마을은 중요문화재 제255호이다.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가 입향해 조성한 마을로 560여 년을 내려온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대부분의 건축물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건립됐으며 9동이 경북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고택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보존상태가 좋고 정리정돈도 잘 돼 있었다. 집집마다 후손들이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담하게 쌓아올린 담장이 눈에 띄었다. 토담으로 된 담장은 옛 정취를 풍겨 정말 아름다웠다. 담장들도 등록문화재라고 했다.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그런 고택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여행을 하다 보면 시간이 잘 간다. 오늘도 이쯤 해서 끝을 내야 한다. 대구로 향했다. 돌아가는 30번 국도 주위에는 온통 참외 하우스였다. 갑자기 참외가 먹고 싶었다. 너무나 먹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자전거를 세워놓고 아주머니께 참외 한 개만 달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상자로 파는 건데 한 개는 팔 수 없다"고 하시면서도 "대구에서 이곳까지 왔냐"고 묻고는 흔쾌히 깎아주셨다. 아삭아삭 씹는 맛도 있고 당도도 대단했다. 이제껏 내가 먹은 참외 중에 최고의 맛이었다. 돈을 드렸으나 아주머니는 받지 않았다. 페달을 밟으면서도 참외의 달콤한 맛과 향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맛있었다.
이번 여행 역시 귀중한 문화재를 둘러봤다. 유명한 성주 참외도 맛봤다. 맛도 맛이지만 참외의 달콤한 향기를 가득 담아 너무너무 기분 좋은 여행이었다.
윤혜정(자전거타기운동본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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