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장흥 무산 김

입력 2013-06-27 14:29:19

염산 쓰지 않는 김 채취현장…CCTV가 온종일 지켜

오늘 일정은 염산을 뿌리지 않고 무산(無酸) 김을 생산하는 바닷가 현장을 찾아가는 것이다. 갑자기 정한 프로그램이어서 막막했지만 무작정 바닷가 쪽으로 달려가면 해답이 나오리라는 똥배짱을 앞세워 길을 나섰다.

그때 마침 숲 속 외통수 도로에 발통이 빠진 차 때문에 길이 막혀 있었다. 우리 측 운전 전문가가 핸들조작을 코치하고 나머지 도반들이 차 뒤에 달라붙어 밀었더니 비교적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눈 끝에 "무산 김 채취 현장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동네가 바로 그 동네라"고 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인연이란 게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알려준 대로 우리는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안삭금 마을 237-1번지 정병조 씨 댁(061-867-5402)을 입력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장흥 억불산 편백숲 우드랜드에서 30분이면 충분하다는 길이 40~50분은 좋게 걸려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무렵 마을에 도착했다. 시골길을 걷다가 동네 사람을 만나 길을 물으면 "반 마장만 가면 금방 나와요"라는 미워할 수 없는 거짓말이 이 고장에서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달리는 차창에 파노라마로 지나가는 어촌 풍경은 쉴 새 없이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인연이란 무엇인가'란 궁금증이 선방에서 안거에 든 스님의 화두처럼 지워지지 않고 내 의식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정말 인연이란 무엇인가.

인연(因緣'fate)은 운명과 숙명으로도 통한다. 그러니까 운명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인연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그렇게 되도록' 계획되어 언젠가는 실행되도록 되어 있다는 그 말인가.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는 폼 잡으며 지껄이는 말은 결국 듣기 좋으라고 지어 낸 헛말에 불과한 셈인가.

인연의 인(因)은 결과를 낳기 위한 내적인 직접원인이며 연(緣)은 이를 돕는 외적인 간접원인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씨앗은 나무의 직접원인인 인이며 햇빛, 물, 공기는 싹트게 하고 성장시키는 간접원인이 되는 연에 해당한다. 그러면 오늘 아침 숲속 펜션에서 자고 일어나 목적지로 가려는 길목에서 일어난 작은 인연은 어느 것이 인이고 어느 것이 연이란 말인가.

불가에서는 흔히 만남이란 인연을 말할 때 겁(劫)을 들춘다. 만남은 수천 겁을 지난 후에 '인연의 겁'으로 결실을 맺는다고 한다. 일겁(一劫)의 시간은 물방울이 떨어져 집채 만 한 바위를 닳아 없애는데 소요되는 시간이라 한다. 범망경(梵網經)에 따르면 하룻밤 같이 자는 것도 6천 겁이 지나야 가능하다니 우리의 오늘 인연은 몇천 겁을 지나 이뤄진 결과일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득하여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온다. 쉽게 결론을 내버리자. 가수 노사연이 부른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란 노래 한 소절로 해답을 내버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동네는 텅 비어 있었다. 주민 모두가 봄놀이 가버리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한 분이 무료의 방석을 깔고 양지쪽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가 전해주는 무산 김에 대한 정보는 알뜰했다.

이 동네는 염산 사용을 일절 금지하며 2천만원짜리 CCTV가 바닷가에 세워져 24시간 감시를 하고 있다. 그리고 김 채취는 12월에 시작하여 첫 상품이 12월 10일 경에 나와 미리 예약한 단골들에게 택배로 부쳐진다. 가격은 시중 시세 속당 1만원짜리를 포장을 하지 않으면 싼 값으로 살 수 있다.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차에 올라 라디오를 켰다. 이럴 때 이선희의 '인연'이란 노래가 흘러나와 연속 홈런을 때려 주었으면 좋으련만 우리의 인연은 안삭금 마을 순례로 끝나고 말았다.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내 생애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창문을 열고 혼자 흥얼거렸더니 바람이 휘익 불어와 모자를 날려 버렸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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