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환 교수의 세상보기] 적을 멀리하면 이길 수 없다

입력 2013-06-22 07:18:10

"도량이 넓고 대범해라, 주눅 들지 말고, 절대 거드름 피우지 마라. 온갖 예의를 다해라. 그러면 웬만한 결점은 용납된다. 상대방이 싫다는 것을 억지로 권하지 마라." 1971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키신저를 안내하기 위해 비밀리에 파키스탄에 파견할 4명의 외교관에게 내린 지침이다. 중국과 미국은 한국전쟁의 당사자였고 그때까지 외교 관계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 중소 관계는 험악해졌다. 1969년에는 진보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군사 충돌도 있었다. 중국은 소련(현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이 필요했다. 전망이 보이지 않는 베트남전쟁을 끝내고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미국 역시 중국이 필요했다.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하기 일 년 전, 마오쩌둥(毛澤東)은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거 스노를 초청해 이런 말을 했다. "닉슨이 온다면 나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야기를 하다가 뭔가 성사가 돼도 좋고 안 돼도 좋다. 싸워도 좋다. 한마디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다 좋다."(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1'). 무조건 만나면 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낙관주의다.

1971년 7월 초 중국 측의 안내를 받은 키신저가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두 나라의 대화 물꼬가 트였다. 키신저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챙이 큰 중절모로 위장하고 새벽에 비행기 트랩을 올랐다. 이를 알아챈 영국 기자가 본사에 긴급 전화로 보고를 했으나, 데스크는 "밤새 마신 술이 덜 깬 모양이구나, 빨리 들어가 자"라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상징하듯 의외의 사건이었다. 미국과 중국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 결과 역사가 바뀌었다.

1949년 10월 중공(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공식적 접촉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휴전을 한 이후 1955년부터 체코의 프라하와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배경으로 미국과 중국은 대사급의 물밑 접촉을 계속하고 있었다. 15년간 136차례의 접촉이 있었으나, "합의를 본 사항은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회담의 속기사는 회고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연구원으로 있다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5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있던 첸쉐썬(錢學森)을 귀국시킨 것이 중국의 유일한 성과였다. 천쉐썬은 귀국 후 미사일과 인공위성 개발을 성공시켜, 중국을 현재의 우주 강국으로 만들었다. 당시에는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 같았던 미국과의 물밑 접촉이 결과적으로 오늘의 우주 강국 중국을 있게 한 것이다.

6년 만에 재개될 것으로 기대됐던 남북회담이 좌절됐다. 좌절의 이유를 남북한은 제각각 설명한다. 양측 수석대표의 급(級)과 격(格)을 둘러싼 버티기가 회담이 무산된 원인이었다. 여기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상대 체제에 대한 이해 부족이 있는 듯하다. 북한은 과거 장관급 회담에 "단장으로 내각 책임참사의 명의를 가진 조평통 서기국 1부국장을 내보냈다", "이번에는 남측 당국의 체면을 세워주느라 1부국장도 아닌 국장을 단장으로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통일부는 "조평통 서기국장은 차관보급으로 우리로 치면 정책실장급"이니, "상식과 국제적 기준에 맞게" 급을 맞추라고 했다. 정부의 조직과 역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형식을 둘러싼 양측의 공방 수위가 높아지면서, 회담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은 실종되어 버렸다.

우리 정부는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여기에서 형식은 신뢰를 말한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출발은 남북이 대등한 형식을 갖추었을 때 가능하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전쟁을 하면서 적을 알아 가는 것처럼, 신뢰는 대화를 통해 쌓여가는 것이다. 그리고 적을 멀리하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고, 적을 가까이하면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개성공단은 남북대화의 성과물이며, 대화가 막혔을 때 포격전과 천안함 사건도 있었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이 "얼굴만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표면적 형식주의로 빠지는 우(愚)가 있어서는 안 된다.

계명대 교수·국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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