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마음과 마음을 잇는 힘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감이 존재하는 한, 사랑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 세상이 온통 부서지고 고장 나 보이지만 사랑으로 수리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사랑의 시작이 공감이다.
나와 너 사이에 공감이 없다는 것은 마치 빵을 만들 때 들어가는 밀가루가 없는 것과 같다. 서로 마주하고 있어도 마음은 겉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다. 한 뼘 거리에서 마주 보더라도 등을 돌리면 지구 한 바퀴를 돌아야만 만날 수 있는 거리가 바로 공감이 없는 거리다.
어느 개인 병원의 원장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진료를 하고 나오는 환자들은 병원장에 대해 칭찬 일색이다. 그는 산격동 S병원의 L원장이다. 병원 진료실에서 그를 만났다. 첫눈에 봐도 빈틈없어 보이는 반듯한 인상이다. 환자를 대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특별한 건 없고예. 환자들 입장에서 대하려고 노력합니더. 특히 어르신에게는 '의료 차트 주세요' 하기보다는 '할머니, 종이 쪼가리 주이소' 캅니더."
지금 내 앞에 있는 분은 하얀 가운을 입은, 함부로 말을 걸기에도 주눅 들 것만 같은 이지적 이미지의 의사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는 구수한 사투리가 술술 흘러나온다. 어느새 굳은 마음이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어르신들은 오죽 좋아들 할까 싶다. 긴장된 환자 입장에서 집에서나 들을 법한 '어무이' '할매'라는 친근한 말을 들으니 육신의 병 고치러 왔다가 응어리진 인생 보따리 술술 풀어놓을 판이다. 이쯤 되면 마음의 병까지 고치고 가지 않을까.
그는 진정 공감의 능력을 아는 자다. 공감이란, 남의 입장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차트'를 '종이 쪼가리'로 말하는 것은 투박함이 아니라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신을 비워 타인의 마음 자리까지 내려갈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속을 지닌 자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불가능할 일일 게다. 따라서 공감적 이해는 이 시대의 탁월한 경쟁력인 셈이다.
공감을 시도하는 자가 실로 큰 자다. 작은 그릇은 결코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즉 공감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는 자가 진실로 큰 그릇이다. 아이가 어찌 어른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먼저 가슴을 열어 아이의 눈높이까지 내려오는 쪽이 어른이어야 한다. 강자가 약자에게, 국가가 국민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갑이 을에게까지 내려오는 것이 진정한 공감이다. 즉 '차트'가 '종이 쪼가리'가 되는 순간,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근데 요즘은 순서가 바뀌었다. 약자가 강자에게로, 을이 갑의 수준까지 올라가야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공룡 같은 거대 기업이 무 꽁지만 한 영세 업체에 똑같은 수준에서 한 판 붙자고 한다. 중공업으로 무장된 세계적 기업이 제 상대의 체급도 모른 채, 동네 골목으로 들어와서 숨 가쁜 민초들과 싸우자고 한다. 이것은 마치 어른이 유치원생과의 100m 경주에서 이긴 후 아이 손에 있는 사탕 빼앗아가는 경우와 같다. 이것은 공감도, 경쟁도 아닌 횡포다. 약자를 위한 배려는 적선이 아니라 공존의 절대 원칙이다. 사람은 공감으로 인간다워지고 이 사회는 공감으로 유지된다.
공감의 어원은 '남의 신을 신고 걸어본다'는 의미가 있다. 남의 신을 신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의 신을 벗어야 한다. 내 안에 있는 쓴 뿌리의 신, 탐욕의 신, 타협 없는 사상의 신을 벗어야 한다. 내 신을 벗지 않고는 결코 남의 신을 신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사회는 어떤가. 자신의 신을 여전히 신은 채 남의 신을 신기 위해 무리한 시도를 하고 있다.
진료가 끝났다. 환자로 온 내게 송구스러울 정도로 긴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원장님, 고마웠습니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뒤돌아 나오는 내 귓가에 찐쌀처럼 구수한 원장님의 말이 들려온다.
"목사님, 다음에 올 때는 종이 쪼가리 단디 챙겨 오이소."
이걸 어쩐다. 발걸음이 묵직해져 버렸다. 이미 이어진 마음 떼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상렬/목사·수필가 love2060@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
연휴는 짧고 실망은 길다…5월 2일 임시공휴일 제외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