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향수에 빠져 발목 잡힌 현재 '올드랭사인' 콤플렉스
누구에게나 행복했던 시절이 있고 잘나갔던 때가 있다. '첫사랑, 결혼, 취직과 승진'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머금어진다. 그러나 잘나갔던 과거에 발목이 잡힌 이들이 늘고 있다. '잘나갔던 시절'의 기억에 빠져드는 심리현상인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 콤플렉스를 앓고 있는 이들이 늘고 있다. 올드랭사인은 스코틀랜드 전통민요로 석별의 아쉬움을 달래는 노래.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교차하면서 빚어진 현상이다. 이들은 자기 연민과 현재에 대한 비하, 심지어 우울증에 걸려 현실을 즐기기는커녕 미래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다. '한물간 세대'로 취급받는 이들은 외친다. '나 돌아갈래.'
◆아! 옛날이여
'사는 게 재미가 없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2년 전 그만둔 이정훈(가명'53) 씨는 무엇을 해도 누구와 있어도 재미가 없다. 가끔은 눈물이 쏟아지고 죽고 싶어진다. 아내와 대학생인 두 딸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 것이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노후가 걱정인 것도 아니다. 부동산을 비롯해 상당한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남부럽지 않은 노후가 보장돼 있는 셈이다. 세끼를 꼬박꼬박 집에서 챙겨 먹는다는 '삼식이'도 아니다. 가끔은 골프도 치고 동창모임에도 적극적이다. 그러나 마음만은 왠지 허전하다. 혼자서 있을 때면 멍하니 잘나갔던 시절을 생각한다. 급기야 병원을 찾은 이 씨는 우울증 진단을 받고 말았다. 오늘도 그는 '잘나갔던 시절'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과거가 화려할수록 증상은 더 심각하다.
평생을 공직에 있었던 박태현(가명'62) 씨. 행정고시 출신으로 공직에 있을 때 승승장구했다. 젊은 시절, 한때 '영감님' 소리를 듣기도 했다. 집에서도 '왕' 노릇을 했다. 그러나 정년퇴직 후 사정은 급변했다. 마누라 눈치 보기 바쁘다. 간혹 지인들을 만날 때도 있지만 '잘나갈 때 챙겨주지 못한' 탓에 은근히 무시를 당하고 있다.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에게 강조되는 최고의 미덕은 과거의 자신을 빨리 잊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아요. 불안한 미래도 걱정입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나이 들어서는 쉽지 않지요." 박 씨의 한탄이다.
◆독(毒)이 되는 추억
30, 40대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지역 중소기업에 다니는 최성호(40) 씨. 최근 몸이 뻐근하고 자주 두통을 호소한다. 비록 IMF세대였지만 그의 삶은 비교적 순탄했다. 대학시절 막강 스펙으로 중무장했다. 덕분에 대학 동기생들보다 빨리 취직할 수 있었고 결혼생활도 순탄했다. 최근에는 과장으로 승진도 했다. 적어도 직장에서만큼은 미래가 보장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알 수 없는 허전함에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젊은 시절의 추억에 매일 사로잡힙니다. 그 시절의 패기와 열정이 그립습니다. 한편으로 앞으로의 미래도 걱정이지요."
올드랭사인 콤플렉스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부작용도 불거지고 있다. 단순히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나 신세 한탄에 그치지 않고 우울증을 앓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올드랭사인 콤플렉스의 대표적인 증상은 자신이 누리던 권력과 존경에 대한 향수에 젖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 전문가들은 화려했던 지난날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김양태 계명대 동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병원을 찾는 우울증 환자 중 폼 잡고 살았던 기업 임원이나 고위관료 출신들이 많다. 이들은 '앞으로 비서나 운전기사 없이 어떻게 살지' 하는 사소한 걱정에도 우울해한다"며 "과거의 이상과 현재 자신의 모습에서 오는 괴리감이 커질수록 우울증으로 발전한다. 우울증 치료제와 같은 약물도 도움이 되겠지만 상실의 빈자리는 결국 본인 스스로 채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봉사활동
'봉사하는 자세'.
전문가들이 말하는 올드랭사인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2040미래 연구소 도건우 소장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공하게 되면 오만해지고 독선에 빠지기 쉬워 사람이 변했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인심'을 잃게 된다. 그런 사람일수록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허탈감과 공허감이 크다"며 "각종 사회 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사랑의 집짓기 봉사활동과 같은 각종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는가 하면 분쟁지역을 돌며 중재활동에 전념해 대통령 재임 시절 못지않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인기 배우였던 오드리 헵번도 은퇴 후 아프리카 등지에서 난민구호 활동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바쳤다"고 소개했다.
당사자 못지않게 가족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가족과의 관계가 은퇴 후 삶의 질에 결정적 변수가 될 수 있어서다. 강부환 변호사는 "아무리 잘나가던 사람이라도 일단 지위에서 물러나면 가족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것도 가족들의 지지와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직장에서 성공한 사람 중에서는 가족을 등한시하고 살아온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 퇴직 후 곧장 이혼법정에 서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은퇴 후 각종 명예직에 욕심을 보이는 것도 과거를 부여잡으려는 몸부림 중 하나. 그러나 해결책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전혀 새로운 몰입 대상을 찾는 편이 낫다고 충고한다.
최창덕 전석복지재단 이사는 "봉사활동'종교활동 등은 인생 후반부를 보람 있고 의미 있게 만드는 목표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음식'청소하기, 아내와의 여행 등 작고 사소한 일에서 행복과 보람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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