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렇게 한 뒤에야 비로소 이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용이 있은 뒤에야 후생이 될 것이다.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롭게 사용할 수 없는데도 삶을 도탑게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드물다. 그리고 생활이 넉넉지 못하다면 어찌 덕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서)
연암 박지원은 내 친구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친구이기도 하다. 연암은 나를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고등학교 시절 '허생전'을 비롯한 그의 소설에서 처음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만났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늦게 만난 '열하일기'는 충격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럴 때마다 담긴 문자들이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열하일기'에 담긴 연암의 마음이 부러웠고, '열하일기'에 마음을 담는 연암의 글쓰기에 미쳤다. '미쳐야 미칠 수 있다'고 했지만 연암에 미치고 나서도 난 연암의 모든 걸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연암을 진정 알 때까지 친구가 되기로 했다.
괜한 말이 길었다.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의 여행기이자 삶의 철학을 담은 글이다. 여정'견문'감상이라는 여행기의 성격을 그대로 담으면서도 곳곳에서 연암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전한다. 연암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책문 근처에서 본 것은 중국의 발전된 모습이었다. 술집 탁자 위에 벌여 놓은 잔은 모두 놋쇠와 주석으로 만들고 은처럼 빛을 냈고 단정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한 가지도 구차스럽게 대충 해놓은 법이 없고, 물건 하나도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소 외양간이나 돼지우리, 땔감 쌓아 놓은 것이나 두엄까지도 그림처럼 고왔다.
그 다음에 연암은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이용(利用)이라고. 그 뒤에 후생(厚生)이 있고, 그 다음에야 정덕(正德)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정덕, 이용, 후생'은 '서경'의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백성의 덕을 바르게 하고 백성들이 편하게 쓰도록 하고 백성의 생활을 여유 있게 하는 세 가지를 조화시키십시오'(正德利用厚生唯和'정덕이용후생유화)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일반적으로 정덕을 이용'후생보다 중시해 덕의 실천으로부터 모든 정치 행위가 이루어졌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이용'후생의 문제를 중시했다. 실학자들은 정덕과 이용'후생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동일한 문제의 내외적인 관계라고 하면서 함께 중요하다고 주장하거나 오히려 이용'후생이 정덕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문제라고 하면서 이용'후생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특히 연암은 "이용이 있은 후에 후생이 가능하고 후생이 있은 연후에 정덕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덕과 이용'후생은 선후의 문제이지 중요성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정덕을 이루기 위해 이용과 후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지 정덕보다 이용'후생이 더 중요하다고 연암이 주장한 것은 아니다.
'허생전'에서도 주인공인 허생이 장사를 통해 이용'후생을 이루었지만 결국은 글 읽는 선비로 되돌아간다. 역사 교과서에도 연암을 이용후생학파라고 하면서 기존의 성리학과는 완전히 다른 철학을 지닌 사람이라고 치켜세운다. 그것이 진정 치켜세우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연암은 진정한 성리학자이기도 하다. 실용을 중시하면서도 근본을 버리지 않았다. 실용이 지배하고 있는 지금 시대에 연암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본질을 버린 실용은 허접하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초'중등교육에 민족, 국가, 인간, 철학과 같은 본질을 버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것을 버릴 때 실용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교육은 단순한 경제 현상이 아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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