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영아보건소
1899년 의사 존슨이 제중원을 세울 당시 그는 이렇게 적었다. "한국인의 90% 이상이 절대적 빈곤층에 속하며, (중략)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천연두에 걸려서 살아남을 때까지는 이름을 짓지 않거나 식구 수에 넣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뒤에도 달라지키는커녕 오히려 악화됐다. 민초들의 삶은 궁핍하기 그지없었고, 아이들을 돌볼 겨를도 없었다.
다음 글은 1930년 2월 14일 동산기독병원이 옛 진료소 건물에 '대구영아보건소'를 설립한 뒤 한 아기에 대해 적은 보고서 내용이다. 아기의 이름 대신 '아동번호 127번'으로 기록해 놓았다.
'아버지는 노동자, 일이 없을 때가 많다. 어머니는 공장 노동자, 동이 트기 전에 일 나갔다가 해가 진 후에 돌아온다. 한달 봉급은 50엔. 할머니, 오빠, 언니가 같이 한 방에서 살고 있다. 아기 외에 다섯 식구가 9×9피트(2.3평) 좁은 공간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두 아이가 먼저 태어나 한 아이는 9개월째 결핵으로 죽었고, 다른 아이는 6개월째 이질로 죽었다. 우리들의 어린 아이(아동번호 127번)는 태어난 지 6개월 되던 때 할머니가 영아보건소로 데려왔다. 이미 영양실조가 된 상태였다. 할머니는 영아보건소에거 가르쳐준대로 아이에게 충분한 영양 공급을 한 결과, 아이는 지금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아동 복지'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동산기독병원이 만든 대구영아보건소는 가난한 아기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진료나 검사는물론 우유도 무료였다. 설립 이후 9년간 970명이 등록했고, 매주 평균 30명이 찾았다. 한국인 의사의 부인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죽음을 목전에 둔 아이가 도내 우량아 대회에서 최우수로 뽑히기도 했다. 내용은 이렇다. '1939년 5월 17일 대구도립병원에서 '세계어린이주간 축하행사'가 열렸다. 2세 미만 어린이 204명 중에 건강한 어린이를 뽑는 우량아 선발대회가 있었다. 먼저 40명을 뽑고 우량아 2명을 뽑았는데, 최우수 2명 중 한 명이 대구영아보건소에 등록된 어린이였다. 이들 2명의 최우수 우량아는 대구를 대표해 서울에서 열린 전국우량아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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