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리 대신 양식 광어와 야생 쑥, 반값에 푸짐한 맛
봄철에 잠시 먹을 수 있는 쑥국은 물리지 않는다. 쑥이 나는 기일이 워낙 짧기 때문에 물릴 여가가 없다. '한 그릇 더 먹어 봤으면' 하는 생각을 앞세우고 시장에 나가 보면 이미 때는 늦었다. 연중행사의 하나인 쑥국 먹기는 두 번 이상 먹기가 힘이 든다.
쑥이 나는 계절에 요행히 바닷가 쪽으로 갈 일이 있으면 일부러라도 도다리 쑥국을 챙겨 먹는다. 요즘은 음식이 새로운 아이콘으로 뜨면서 지역마다 철 따라 메뉴별로 붐이 일고 있지만 맛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봄철 도다리 쑥국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바닷가 정식을 파는 식당은 물론 국밥집까지 요리를 잘하든 못하든 간에 '특미 도다리 쑥국'이란 흰 종이에 쓴 메뉴를 기존 메뉴판 옆에 붙여 놓기가 예사다. 그래도 제대로 된 맛을 보려면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는 전문집으로 가야 한다. 이름이 알려진 전문 식당이라고 하더라도 관광버스 몇 대가 밀어닥치면 쑥 건더기는 적어지고 도다리조차 싱싱한 맛이 떨어져 비린내가 날 때도 있다.
요리에 관한 한 나는 꽤 실험적이다. 사 먹는 것이 맛이 없으면 직접 해 먹는다. 부부 공동 작업을 한다는 뜻이다. 꽤 오래전에 봄에 쑥이 나면 겨울에 먹다 남은 청어과메기를 넣고 쑥국을 끓이면 먹을 만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래된 청어과메기는 색깔이 노랗게 변하면서 기름이 바깥으로 나와 먹을 만하게 보인다.
아내는 '이건 아닌데' 하고 고개를 흔들어도 맛없으면 버릴 요량으로 내가 우겨 청어과메기 쑥국을 끓였다. 결과는 과메기의 '짤아빠진' 맛이 쑥의 향을 잡아먹어 버려 완전 개판이 되고 말았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일지는 몰라도 '후회의 아버지'란 생각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자연산 도다리를 사기 위해 활어시장에 나가 보았다. "쑥국 끓이려면 차라리 한 마리 7천~8천원짜리 양식 광어 큰놈이 더 좋아요." 그 말에도 일리가 있을 성싶었다. 변두리 전통시장에서 밑줄기 부분에 붉은 기운이 도는 야생 쑥을 3천원어치를 샀다. 비늘을 벗기고 몸뚱이에 칼집을 넣는 것까지가 내가 할 일이다. 아내가 다시마와 멸치를 우려낸 물에 된장을 풀고 천일염으로 간을 맞추기만 하면 요리는 끝난다. 전문집에서 한 그릇에 1만원 내지 1만2천원을 받는 도다리 쑥국을 직접 끓였을 때 먹히는 원가는 반값 이하였다. 양은 푸짐했고 맛도 훨씬 좋았다.
단군신화가 지어낸 이야기라 해도 나는 단군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쑥을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내 유전자의 줄기세포에도 쑥의 기운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것 같다. 나는 쑥버무리가 맛있고 쑥떡이 다른 떡보다 더 좋다. 환웅이 사람 되기를 원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로 연명하며 햇빛을 보지 않고 100일을 버티면 사람이 되게 해 주겠노라'고 한 약속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호랑이는 실패했지만 곰은 참아내 21일 만에 웅녀가 된다. 곰을 사람으로 만든 주인공인 환웅이 웅녀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남 줄 것 없이 자신이 취하고 둘 사이에 단군을 낳았다. 신화를 만든 일등 공신은 쑥이다. 내가 일 년에 한두 번씩 쑥국 제사상을 마련하여 단군 할아버지를 기리고 왕 할머니인 웅녀를 찬양하는 것은 자손의 도리를 다하는 착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문의 뿌리가 튼튼하면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는다'는 말은 용비어천가에도 있다. 단군가문은 쑥이 뿌리다. 쑥은 봄에 나는 하찮은 풀의 한 종류지만 얕잡아 보면 큰코다친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그다음 해 폐허 위에 제일 먼저 고개를 내민 풀이 쑥이다. 쑥이 질기고 모질듯이 우리 민족의 특성이 바로 그걸 닮았다.
쑥은 약이며 주술이자 술이기도 하다. 뜸의 약효는 쑥의 몫이며 인진쑥을 장복한 말기암 환자들의 회생 기록은 현대의학에서도 불가사의로 알려진 기적이다. 그리고 말린 쑥으로 모깃불을 피우면 벌레들이 범접하지 못했다. 그뿐 아니다. 옛 사람들은 이사 갈 집 네 귀퉁이에 쑥 다발을 태워 잡귀를 물리쳤다. 약이 주술까지 부리니 정말로 신통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쑥을 원료로 술을 빚으면 그게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압생트라는 술이다. 이 술은 예술가들의 창작력과 영감에 도움을 주는 반면 환각작용과 간질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쑥도 한반도를 벗어나면 해방감에 젖어 때론 '호작질'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자신의 귀를 칼로 자른 화가 반 고흐도 압생트의 희생자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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