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 의리의 대구 불어라 '착한' 바람

입력 2013-04-20 08:00:00

도심 매장 곳곳 '나눔' 진원지로

대구가 착해지고 있다.

대구가 착해지고 있다. 지역내총생산(GRDP) 18년째 전국 꼴찌, 상장사 임금 전국 최하위권 등 '경제 성적표'가 초라한 대구. 이곳에 '착한 건물' '착한 골목' '착한 가게' '착한 변호사' 등이 잇따라 생겨나고 있다. 살림살이로 봐서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지만 마음만은 풍성한 대구가 되고 있다.

'착한 것'들이 늘어나면서 나눔 실천을 결심한 착한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이고 있다. '착한 열풍'이 장기 불황, 중산층 붕괴 등으로 고통받는 지역민들에게 활력소가 되고 있는 셈이다.

◆대구가 착해진다?

올 1월 대구 중구 남일동 롯데시네마 아카데미관 건물에 입점한 모든 매장이 '착한 가게'에 가입했다. 건물 전체가 착한 가게에 가입한 것은 전국 최초다. 이곳에는 롯데시네마를 비롯해 파스쿠찌 아카데미점, 유가네 닭갈비, 문스떡볶이 아카데미점, 깔로레 아카데미점, GS25, TGI 아카데미점, 망고식스 아카데미점, 멘붕 액세서리 등 9개 매장이 입점해 있다. 이들 매장은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이하 공동모금회)에 각각 매달 3만원씩 기부한다.

1년 전 이곳에 문을 연 문스떡볶이 주인 문건희 씨는 "한 건물에 있는 가게가 모두 기부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착한 이웃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분이 좋다. 기부문화를 확산시키는 불쏘시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최근에는 '착한 가격'도 선보이고 있다. 주먹밥 1천원, 어묵 한 그릇 2천원 등으로 파격적인 가격으로 손님들을 맞고 있다.

문 씨의 바람은 곧바로 현실화되고 있다. 이 건물에서 시작된 '착한 바이러스'가 인근 가게까지 전파되고 있는 것. 맞은편에 위치한 아카데미마트는 최근 1천원대 잡화를 선보이고 있다. 양말, 우산 등 각종 잡화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착한 바이러스'는 몇 달이 안 돼 한 골목 전체를 감염시켰다. 이달에는 대구 중구 동인동 찜갈비골목에 위치한 12개 식당 모두가 '착한 가게'에 가입했다. 전국 처음으로 '착한 골목'이 탄생한 것. 이들은 첫 기부액으로 매달 3만원씩 공동모금회에 기부하며 앞으로 기부액을 점차 늘릴 계획이다.

중구청 김남훈 홍보 담당자는 "착한 시장, 착한 편의점, 착한 나들가게, 착한 SSM(기업형슈퍼마켓), 착한 커피숍 등으로 무한 확장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착한 변호사'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데블스 애드버킷'(악마의 변호인)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변호사에 대한 일부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고 있다. 사랑의 열매 대구지역 봉사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익현 변호사는 최근 착한 변호사에 1호로 가입했다. 평소 그는 대한적십자사를 통하거나 대구지역 변호사들끼리 모여 정기적으로 모금운동을 펴는 등 기부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착한 가격'이 제일 착해

돈 쓸 일이 많아 걱정이 태산이다. 허리띠를 아무리 졸라매도 가벼워진 지갑은 마음마저 공허하게 만든다. 이럴 때 값싼 상품이나 서비스만큼 착한 게 어디 있겠나? 마침 우리 주변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착한 가격'으로 기쁨을 주는 곳이 많이 생기고 있다.

16일 오후 동구 신암동의 막창전문집 '그날'. 직장인들이 주로 찾는 이곳은 저녁모임에 나온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각종 재료가 들어간 한방막창을 6천원에 즐길 수 있다. 주인 김병활 씨는 "평소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다. 착한 가게에 가입할까도 생각했지만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것만큼 더 착한 것은 없다는 생각에 이윤을 줄이는 대신 착한 가격을 선보이게 됐다"고 했다.

17일 찾은 남구 대명동 대구시설관리공단 빌딩 1층의 한 카페. 간판도 없고 이름도 없다. 이곳에선 모든 음료의 가격이 300원으로 80여 명의 직원이 저렴한 가격에 커피 등 다양한 음료를 즐길 수 있다.

'착한 커피'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중구 동성로의 '봉다리' 등 일부 카페들은 2천원대 커피를 내놓고 있다. 인근 일부 프랜차이즈 카페들도 4천, 5천원대 커피를 3천원대에 판매하고 있다. 종교시설이 운영하는 카페들도 '착한 행렬'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중구 서성로에 있는 '이스트 힐'은 제일교회가 운영하는 카페. 이곳에선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등을 1천원대에 맛볼 수 있다. 인근 서현교회 내 'GNI'와 북구청 인근의 교회 카페도 1천원대의 음료와 커피를 판매하고 있다.

착한 인터넷 쇼핑몰도 늘고 있다. 특히 외국의 유명 메이커 제품을 반값 수준에 구입할 수 있어 알음알음 이곳을 찾는 단골 고객들이 늘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 중인 김진형(37) 씨는 "시중에서 10만원 이상인 의류들도 4만~5만원에 판매하고 있다. 외국 상점과 직거래를 하고 마진을 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고 했다.

◆착한 마음으로 확산

착한 건물, 착한 골목, 착한 커피 등 착한 것들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까지 착해지고 있다. 나눔실천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대구에서는 6천여 명이 개인 소액 정기 기부 캠페인인 '나눔천사'에 참여했고 1998년 공동모금회 설립 후 처음으로 전국 1위 목표액 달성률(130%)을 기록하기도 했다.

공동모금회는 이와 함께 달님'별님'해님천사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캠페인 발대식을 가진 데 이어 지난 연말부터는 매일신문사와 대구를 나눔 1번지로 만들기 위한 공동기획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이미 대구은행 임직원 3천여 명이 달님천사에 가입했고 대구시 노조도 올 초 1천4명이 캠페인에 참가했다. 17일 현재 이 캠페인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은 1만7천53명에 달하고 기부금액은 15억원을 훌쩍 넘었다.

공동모금회 김찬희 홍보 담당은 "대구 시민의 따뜻한 마음으로 대구가 착한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이는 경제적 발전 못지않게 대구를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다. 행복 바이러스 전파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고소득층 참여는 저조

행복 바이러스가 닿지 못한 사각지대도 있다. 착한 건물과 착한 골목이 등장하고 서민과 저소득층의 기부와 봉사활동이 느는 데 반해 고소득층의 참여는 저조한 편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이 무색해지고 있는 셈이다.

현재 대구의 아너소사이어티 클럽 회원은 9명으로 서울(27명), 경남(26명), 부산(24명), 울산( 22명), 인천(18명) 등에 비해 턱없이 저조한 편이다. 아너소사이어티는 개인은 1억원, 법인은 30억원 이상 기부하거나 기부를 약속한 기부모임.

고액기부자들이 적다 보니 모금액 역시 전국 최하위 수준이다. 지난해 모금회를 통해 들어온 대구지역의 모금액은 93억5천600만원으로 서울(526억원), 경기(292억원), 부산(123억원) 등 대구보다 덩치가 큰 지역은 물론 충남(133억원), 전남(94억5천만원) 등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고액기부의 활성화를 위해 이달 4일 공동모금회는 처음으로 대구 아너소사이어티 클럽 회원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의 주제는 당연히 '나눔문화 활성화'였다. 이 자리에서 조해녕 공동모금회 회장은 "대구의 아너소사이어티 클럽회원의 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적은 편이다. 정과 의리의 도시인 대구의 명성과 위상에 비교하면 아쉽다. 나눔문화 활성화를 위해 클럽 가입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한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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