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도로명 의무화…사회 변화상
"니 무슨 동네에 사노?" "난 달구벌대로에 사는데…."
내년부터 이 같은 동문서답이 현실화된다. 지난 100년간 사용하던 '○○동 ○○번지'의 지번(地番) 주소 방식이 내년부터 '대로'와 '길'을 중심으로 한 도로명으로 싹 바뀌기 때문이다. 도로명 주소의 등장으로 사회 전반에 변화의 바람이 예고되고 있다.
◆도로명 주소 정착
이달 2일 오후 대구 북구 칠성동 대구소방안전본부 119 종합상황실.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신고자 주소가 상황실 전광판에 표시됐다. 옛 지번 주소가 많았지만 간간이 도로명 주소가 적힌 것도 있었다. 옛 주소로 신고된 것은 자동으로 도로명 주소로 전환됐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서상국 소방교는 "10건 중 2건 정도는 도로명 주소로 신고가 들어온다"고 했다. 다만 "아직 일부 시민들만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 도로명 주소가 시민들 사이에 정착이 안 되는 바람에 도로명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기 집이 아닌 경우 도로변에 있는 도로 주소만을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명확하게 신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도로명 주소 사업을 시작한 지 이미 18년째다. 1996년부터 국가경쟁력강화기획단에서 추진한 사업으로 국가 경쟁력 제고와 위치 찾기의 편리성을 위해 시작했다. 18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친 도로명 주소는 내년부터 의무화된다.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도로명 주소 국민 이용률은 22.6%에 이른다.
정일교 대구 중구청 민원토지과 주무관은 "기존에 우리가 사용하는 주소가 일제강점기의 잔유물이고 실제로 대형건물이 많은 대로변에선 주소만으로 찾기 힘들다는 점을 들어 도로명 주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그동안 건물번호판과 홍보비, 주소 체계를 바꾸는 시스템 등 우리나라 전체 주소를 바꾸는 데 무려 3천800억원이 소요됐다. 그러나 향후 수조원의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배달의 천국
도로명 주소의 등장으로 우리 사회에도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배달, 택배, 택시업계는 반색이다. 취재진은 새 주소만 가지고 음식 배달이 되는지를 실험했다. 치킨부터 짜장면, 피자까지. 개인음식점은 물론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까지 다양하게 주문했다. 대부분의 업체에서는 '총알배달'이 가능했다. 수성구 만촌동 삼성반점 임태용 사장은 "새 주소의 경우 원리만 알면 배달하기가 참 수월하다. 신참 배달원이라도 일주일 정도만 배달하면 금세 숙달된다. 도로명 주소가 도입되면서 배달의 천국이 됐다"고 신나했다.
그러나 일부 업체는 당황하기도 했다. '현재 쓰고 있는 주소를 알려달라' '주변에 큰 건물이나 알 만한 곳을 알려달라'고 했다. 북구 태전동 한 중국음식점은 "아직 많은 사람들이 옛 주소로 배달을 주문한다. 굳이 우리가 이를 알려 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특히 빌라, 아파트 등은 도로명 주소가 없어도 충분히 손쉽게 배달이 가능하다"고 했다.
택배업계도 도로명 주소가 어느 정도 정착되고 있다. 지역밀착적 성격이 강한 음식 배달업계와 달리 대구 전역을 무대로 삼고 있어 내심 도로명 주소가 반갑다. A택배업체 측은 "몇 년 사이 열 명 중 두세 명은 새 주소로 주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택배업은 이직률이 높은 편인데 신참 택배기사들도 쉽게 주소를 찾아갈 수 있다"고 했다.
택시업계도 사정은 마찬가지. 택시기사 정모 씨는 "내비게이션에서는 도로명 주소를 검색해도 위치가 잘 나타나지 않지만 도로명 주소가 워낙 찾기 쉬운 구조로 돼 있어 손님을 목적지까지 빠르고 안전하게 모시는 데 수월하다"고 했다.
◆도로명 주소를 알면 길이 보여
현행 지번 주소는 말 그대로 토지 중심의 주소 체계다. 새로 생기는 건물과 땅에 새로운 번호를 부여한다. 이에 따라 '11번지' 바로 옆에 '500번지'가 생기는 등 동네 토박이조차 주소로 위치를 찾기는 어렵다.
반면 도로명 주소의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도로에는 도로명을 붙이고 건물에는 도로를 따라 건물 번호를 붙이는 방식이다. '왼쪽은 홀수, 오른쪽은 짝수'만 기억하면 누구든지 '길 찾기 달인'이 된다. 이미 좁은 길에서도 길 찾기가 쉽도록 길과 번호를 표시한 건물 번호판은 전 국토 구석구석에 부착이 완료된 상태다.
특히 도로명판만 보더라도 자신의 위치, 거리, 방향 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간선도로에 100m 간격으로 일련번호를 붙여 왼쪽은 홀수 번호(1길'3길'5길 등), 오른쪽은 짝수 번호(2길'4길'6길 등) 순으로 도로명을 붙인다. 도로의 폭에 따라 40m, 또는 8차로(왕복) 이상이면 '대로', 12~40m, 2~7차로는 '로', 기타는 '길'로 구분했다.(그림 참조)
번호가 높을수록 도로 끝지점이고 번호가 낮을수록 도로 시작점이다. 도로구간의 시작점과 끝점 구분은 도로명판의 화살표 방향에 따른다. 새 주소는 현재 쓰고 있는 지번 주소와 구'군까지는 같지만 동 이름과 지번 대신 도로명과 건물번호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대구시 중구 동성로 2가 100-1'은 '대구시 중구 동성로 31'로 쓴다.
◆사각지대
직장인 A씨는 등기부등본이 필요해 동사무소를 찾았다 당황스러웠다. 도로명 주소만 알면 될 줄 알았는데 옛 주소를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다행히 인터넷 검색으로 지번을 찾고서 등본을 뗄 수 있었다.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는 직장인 B씨 역시 부동산 거래를 위해 공인중개소를 찾았다가 헷갈렸다. 부동산 거래를 할 때 거래자의 주소는 도로명 주소로, 소유권이 이전되는 부동산의 주소는 지번으로 표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로명 주소가 정착되고 있지만 여전히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있다. 내년부터 도로명 주소가 전면 의무시행되지만 등기부등본 등 부동산 소유권 관련 문서는 옛 주소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도로명 주소가 전면 의무화되더라도 부동산 매매나 임대차 등 법률관계에서는 지번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새 주소만 알고 있을 경우 등기부등본이나 토지대장 등을 확인하는 것이 어렵다.
도로명 주소는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는 토지, 건물이나 도로가 없는 토지 등은 지번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에 따라 부동산 거래 등 일상생활에서 부동산 주소 따로, 생활 주소 따로 사용해야 하는 불편이 예상된다. 최성호 변호사는 "등기부등본으로 전입신고를 한 후 이를 확인하기 위해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두 문서의 주소가 일치하지 않게 된다. 결국 전입자는 도로명 주소와 옛 주소(지번 주소)가 일치하는지 따로 확인해봐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글'사진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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