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꽃도둑이다/ 이시백 지음/ 한겨레 출판 펴냄
일찍 일어나봐야 앙앙거리는 마누라의 잔소리에 시달릴 생각에 김명식은 눈을 꾹 누른 채 건성으로 코고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눈치라도 챈 듯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전화가 요란스레 울어댄다.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자신과 동갑이라는 소리에 1천300원이나 주고 내려받은 전영록의 노래였다. 더듬거려 전화기를 집어 드니 황치산 회장이다.
"회장님이셔유?"
식전부터 걸려온 전화에 대고 댓살 부러진 가오리연처럼 허리방아를 찧어대는 명식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마누라가 낚싯바늘처럼 눈을 고부라지게 뜨고 노려본다.
"회장은 개뿔."
(중략) 청심회는 청계천 주변에서 가까이 지내온 이웃끼리 만든 친목계였다. 명식은 벌써 2년째 청심회 총무 노릇을 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두룩 멸치 대가리 한 줌 돌리는 적두 없는 주제에 회장 행세는 오라지게 허구 자빠졌네. 월급 주는 회사두 쉬라는 공일날에 새벽부텀 즌화 넣어 심부름을 시켜? 에라이, 벼룩이두 이마빡이 있구 날파리두 뒤통수가 있다는디, 고렇게 얌통머리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 세상에 또 워디 있간. 허긴 남 말 허믄 뭐혀? 그걸 회장이라구 상전처럼 섬기는 것들이나그 맹꽁이에 그 개구리지 뭐여."
소설 '나는 꽃도둑이다' 의 도입부 일부다. 요즘 소설에서 보기 힘든 예스러운 문체에다 생활의 문체(구어체에 가까운)이다. 이시백의 이 소설을 읽다보면 책 속의 인물을 만나는 게 아니라 실존인물을 직접 대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어의 생동감을 만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 툭툭 튀어나오기 마련인 능청과 익살, 뻔뻔스러움과 번잡스러움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다.
소설 '나는 꽃도둑이다'는 세월의 화려한 변화 뒤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청계천변 움막이 보기 흉해서 말끔하게 덮어버렸다. 흉물 같은 집들을 싹 덮어버리니 깨끗해서 좋았다. 다시 세월이 흘러 그걸 뜯어내고 개울에 맑은 물 흘려보내 잉어가 헤엄치게 하고, 향기로운 꽃나무 심으니 좋았다. 그러나 그 보기 좋은 일을 하는 동안 누군가는 움막에서 쫓겨났고. 누군가는 생활터전을 떠나야 했다. 이 소설은 맑은 물을 위해, 잉어의 보금자리를 위해, 향기로운 꽃나무를 위해 쫓겨난 사람들 이야기인 동시에 개발과 욕망에 떠밀리는 천변의 풍경이다.
청계천 주변 상인들의 친목 모임인 '청심회' 회원들이 어느 날 파출소로 잡혀간다. 청계천에 올라온 잉어를 잡아먹은 게 들통 난 줄 알았더니, 청계천 '복원공사'를 기념해 시장이 박아놓은 명판이 뜯겨나갔던 것이다. 소설은 사건 당일 청계천 주변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시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풍경으로서 '청계천 정비사업'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 풍경을 풍자함으로써 시대를 풍자한다.
'청계천 정비사업'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아니 할 말로 소설가 이시백이 청계천 사업을 아무리 신랄하게 풍자한들, 사람 저마다의 평가가 달라질 리 없고, 바뀐 청계천이 옛날로 돌아 갈 리도 없다. 맑은 물에서 헤엄치는 잉어가 하늘로 솟을 일은 더더구나 없다. 그러니 청계천 사업에 대한 독자 개인의 평가는 일단 차치하고 소설 자체의 재미에 빠져볼 일이다.
문학평론가 고명철은 "뾰족한 대책은 쥐뿔도 없는 주제에 이러쿵저러쿵하는 제 흥에 못 이겨 그 잘나고 질펀한 개똥철학을 실컷 주억거리고 싶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작가 이시백의 소설에 귀를 기울여 보자"고 말한다. 그야말로 오랜 만에 소설 읽는 재미를 선사하는 소설을 만났다. 294쪽, 1만2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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