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화염·비명소리 악몽…약봉지로 겨우 버텨"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지하철 참사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인터뷰 내내 되뇌었던 말이다. 참사 뒤 이들은 예전의 삶을 잃었다. 직장과 가족, 친구와 이웃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밤마다 10년 전 악몽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굿을 두 번해도 소용없네요" - 김호근 씨
"전쟁보다 더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지…."
2'18 참사 부상자 중 최고령자인 김호근(78) 씨는 비교적 담담하게 당시를 떠올렸다. 부산행 열차를 타려고 대구역에 가기 위해 안지랑역에서 지하철을 탔던 김 씨는 운명의 장난(?)처럼 방화범 김대한이 있던 1079호 전동차 1번 칸에 타게 됐다.
"빈 좌석이 없어서 문 앞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불이야"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고개를 돌려보니 벌써 연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쯤에야 문이 열렸고, 승객들은 혼비백산해서 출입구로 몰렸죠. 난리통에 뒷사람들이 떠미는 바람에 쇠 손잡이에 얼굴을 심하게 부딪혀서 깜빡 기절했습니다. 눈을 떠 보니 앞니 5개가 부러졌더군요."
연기는 자욱했고, 주변은 깜깜했으며 입 주위는 피투성이였다.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지하 1층을 향해 기어올랐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이고도 필사적인 탈출이었다."
지하 3층에서 1층까지 간신히 올라왔는데, 화장실 근처에서 다시 정신을 잃었다. 나중에 깨고 보니 병원이더란다.
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해 건강을 자신했던 그는 사고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지인들과 함께 운영하던 오퍼상에서 손을 뗐다. 호흡이 가빠지면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았고, 지하철을 타는 것이 두려워 장거리 외출도 힘이 들었다. 길을 걸으면서 자동차 배기가스만 맡아도 가슴이 답답하고 구역질이 난다.
별다른 이유없이 시력도 잃어갔다. 사고 이후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해 안경을 꼈고, 지금은 실명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2010년엔 위암 수술을 받았고, 당뇨병까지 겹쳤다. 그는 위암도 사고 당시 들이마신 유독 가스 탓이라고 믿고 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악몽이다. 참사 당시 1층으로 기어오르던 중 한 아주머니가 "살려달라"며 그의 허리띠를 붙잡았다. 제 몸 하나 가누기도 어려운데 함께 가려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허리띠를 풀고는 엎어지고 넘어지며 살길을 찾았다.
"병원에서 20여 일 동안 매일 꿈속에 그 아주머니가 나타났습니다. 아직도 악몽으로 고함을 지릅니다."
보다 못한 부인의 권유로 굿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스불만 봐도 겁나요" - 한태순 씨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30분. 한태순(가명'70'여) 씨는 대구도시철도 1호선 각산역에서 1080호 전동차에 몸을 실었다. 중구 약전골목에 있는 회사에 오전 10시까지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화장품 방문 판매를 했던 한 씨는 성격이 쾌활해서 사람 만나는 일을 좋아했다. 병상에 누운 남편의 병원비라도 벌자며 시작한 일이었다.
전동차가 중앙로역에 도착했을 때 희뿌연 연기가 바깥에 가득 찼다. 처음에는 '작은 불'이 난 것이라 여겼다. 그날 목도리를 하고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목도리로 코와 입을 가리고 어둠 속에서 발자국 소리를 쫓아 손을 짚고 계단을 기었다.
아픈 남편이 자꾸 눈에 밟혔다. "살려 주세요!"라며 목도리를 풀고 고함을 지를 때 멀리서 반짝이는 작은 불빛이 보였다. 그렇게 소방관 옷자락을 붙잡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절했다.
연기를 많이 마셔 호흡기가 상한 것도 문제였지만 밤마다 되살아나는 사고 기억이 그를 더 힘들게 했다. 병원에 입원해 무려 5개월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2005년 10월,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한 씨는 남편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여겼다. 남편 제삿날이 되면 그날의 기억은 더욱 또렷해진다.
한 씨는 지금도 불이 무섭다. 외출할 때는 가스 밸브가 잘 잠겼는지 열 번 넘게 확인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집 앞 각산역은 쳐다만 봐도 치가 떨려 10년째 지하철을 외면한다. 처음에는 차도 무서웠지만 이제 버스를 타고 겨우 움직인다.
가장 힘든 것은 어둠과의 싸움이다. 깜깜한 밤이 싫어 잘 때도 거실에 불을 훤히 켜둔다. 그래도 살려달라고 외치는 죽은 자들의 고함, 집 창문에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들어오는 꿈은 매일 밤 반복된다.
매일 아침과 저녁, 우울증 약을 한 움큼씩 먹지 않으면 잠에 들지 못할 정도다.
"차라리 그때 죽을 것을, 왜 살아서 이렇게 고생하나 싶어요. 세상을 떠나려고 해도 아직 결혼 못한 큰아들이 계속 내 발목을 붙잡네요." 그에게 10년 전 사고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내 목소리가 싫습니다" - 김문영 씨
김문영(가명'66'여) 씨는 피곤하면 목부터 아파져 온다. 감기에 걸려도, 슬픈 일이 생겨도, 건강과 감정 변화에 목이 가장 먼저 반응한다. 김 씨는 10년 전 지하철 참사 때 후두를 심하게 다쳤다. 목 통증과 사고 기억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다.
10년 전 2월 그날, 김 씨는 아양교역에서 1080호 전동차를 탔다. 성당못역 근처에 있는 종교단체에서 '마음 수련'을 해온 지 6개월쯤 되던 날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기도문을 묵상하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 갑자기 불이 꺼진 전동차가 김 씨를 깨웠다. 생각할 틈도 없이 전동차 문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이 어두워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고 그는 다시 전동차에 타려고 했다.
김 씨는 "그때 전동차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여태껏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나았을 걸…"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눈을 떠보니 대구파티마병원 응급실이었다. 공무원들이 다가와 집 주소와 연락처를 물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사고 이후 기억력이 급격하게 나빠져 1년 전 일도 까마득하다.
2003년 2월 18일의 기억만 뚜렷할 뿐이다. 사고 다음 날 기침을 하자 시커먼 덩어리와 피 섞인 고름이 섞여 나와 하루에 두루마리 휴지 2통을 썼다. 영동세브란스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목 안에 화상을 입었다.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병"이라고 했다.
김 씨는 자신의 목소리가 싫다고 했다. "목에서 쇳소리가 나와서 사람들과 대화하기 무섭다"고 했다. 등산과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지만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종교단체에서 집으로 계속 엽서를 보내고, 친구들도 "계모임에 나오라"고 연락했지만 모든 관계를 끊었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 무서워 백화점도 가지 않는다. 계속되는 짜증과 공포 때문에 남편과 사이도 멀어졌다. 슬픈 드라마를 보면 더 슬퍼져서 쾌활한 드라마만 골라서 본다.
당뇨병과 호흡기질환, 심장병, 우울증.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 그가 앓는 병들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내과부터 정신과까지 진료를 다 받고 약봉지를 잔뜩 받아온다. 처음에는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이제는 약값이 아까워 동네 의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꿈속에 밤마다 얼굴이 시커멓게 탄 아기들이 찾아온다. 검은 연기가 쫓아와 계속 쫓기는 꿈도 꾼다. "항상 어디론가 도망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성격도 너무나 급해졌습니다."
기획취재팀=이창환기자 lc156@msnet.co.kr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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