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나갈까, 얼마나 받을까…세배돈 둘러싼 '불평등 경제학'

입력 2013-02-09 08:00:00

'얼마를 줄까' vs '얼마를 받아야 하나'. 설날 아침이면 집집마다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평소 못 보던 친지들을 만나는 기쁨도 잠시. 세뱃돈 나갈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적게 주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고 넉넉하게 주자니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다. 세뱃돈의 형평성을 맞추는 것도 어렵다. 유치원생 조카나 고등학생 조카에게 달랑 1만원 한 장을 주자니 영 기분이 개운치 않다. 그렇다고 이 불황에 몇만원을 덥석 쥐여줄 수도 없다. 요즘 같은 불경기. 명절 스트레스 중 단연 수위를 차지한다. 부담감과 유쾌함이 묘하게 공존하는 세뱃돈. 잘 주고 잘 받는 법이 필요하다.

◆명절 스트레스중 수위

사촌형제만 14명인 최모(42) 씨는 설 명절이 두렵다. 사촌형제들이 모두 모이면 조카들은 20명을 넘는다. 갓 돌을 넘긴 아이부터 취업준비생까지 연령대도 천차만별이다. 1만원씩만 줘도 20만원이다. 그렇다고 '세뱃돈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며 1만원짜리 한 장을 달랑 내밀 수는 없어 보통 50만원 이상이 세뱃돈으로 지출된다. 유치원생이라고 해서 1천원이나 5천원짜리를 쥐여주기도 지켜보는 사촌형제들의 눈초리가 은근히 신경쓰인다.

최 씨는 "6살짜리 아들과 3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이제 갓 3살 된 아들은 세배 자체를 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우리 아이가 받는 세뱃돈에 비해 나가는 지출이 너무 많아 손해라는 생각이 든다"고 푸념했다. 최 씨는 퇴근 후면 아직 말도 잘 하지 못하는 3살 난 아들에게 '세배 연습'을 시키고 있다.

고등학생 김성민(16) 군의 집안에서는 세뱃돈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원칙이 적용된다. 나이를 불문하고 같은 액수를 주는 것이 불문율처럼 굳어져 있다. 김 군은 "어릴 때는 나이 많은 형들과 같은 금액을 받아 기분이 우쭐했는데 고등학생이 되고 보니 초등학생인 막냇동생과 똑같은 세뱃돈을 받는 게 자존심이 상한다"고 했다.

대다수의 가정에서 고등학생까지는 세뱃돈을 주지만 일부에서는 '일정한 수입이 있느냐'를 기준으로 대학생과 취업준비생까지 세뱃돈을 주기도 한다.

◆세뱃돈 적정수준은?

뭐니 뭐니 해도 세뱃돈을 얼마나 줘야 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다. 지갑은 얇아지고 있는데 '적정 세뱃돈' 수준은 몇 년 사이 배 가까이 올랐다.

한화생명이 최근 임직원 905명을 대상으로 '설 세뱃돈 적정 수준'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공개했다.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까지는 '1만원'을 주는 게 가장 적당하다는 답변이 전체의 55%를 차지했으며 중학생은 3만원(41%), 고등학생은 5만원(38%), 대학생은 5만원(46%) 10만원(28%) 순이었다. '안 줘도 된다'는 답변도 14%로 나타났다. 세뱃돈을 주기 애매한 경우는 '취업준비생 조카가 세배할 때'가 전체의 22%로 가장 많았다.

반면, 2007년 롯데백화점이 고객 3천16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초등학생의 세뱃돈은 1만원(59.4%)이 적당하다고 응답했으며, 유아'아동에게는 5천원(56.3%), 중학생에게는 2만원(35.1%), 고등학생에게는 3만원(37%), 대학생에게는 5만원(40.1%)이 적당하다고 답했다. 6년 사이에 배 가까이 오른 셈이다.

받는 이와 주는 이의 입장 차이도 상당하다. 2011년 설날을 앞두고 인사이트코리아 패널아이가 남녀 총 5천7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세뱃돈으로 받고 싶은 금액은 평균 7만2천원이며 주고 싶은 금액은 3만6천원으로 나타난 것. 구체적으로는 세뱃돈을 줄 경우 1만~5만원 사이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응답자가 68.2%에 달한 반면 받는 입장에서는 41.9%에 달했다. 반대로 5만~10만원 사이는 받는 입장의 응답자 중 30.3%가 적당하다고 답했으나, 주는 입장의 응답자는 16.4%에 불과했다.

◆주는 맘 받는 맘이 달라요

세뱃돈 시장에서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간의 간극은 상당하다.

초등학생 이은미(10) 양의 목표는 3만원 이상이다. 통장에 넣어 놓고 돈이 모이면 스마트폰을 구입하기 위해서다. 아버지 이정훈(39) 씨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1만~2만원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딸이 어린데다 세뱃돈을 많이 주는 것은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에서다. 중'고교생의 부모들은 자식과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으려 한다. 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둔 김정란(43) 씨는 이번 설에 자식들에게 5만원씩을 세뱃돈으로 줄 생각이다.

"평소 한 달 용돈으로 3만원을 주고 있어요. 교통비와 책 등을 구입하면 용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세뱃돈은 5만원 정도로 줄 예정입니다."

반면, 김 씨의 아들 민호(14) 군의 목표는 10만원대다. 1년에 딱 한 번 있는 '대목'인 만큼 짭짤한 수입을 올려 1년을 버틸 예정이다. 좋아하는 옷도 싸고 곧 있을 여자친구에게 생일 선물도 사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내심 괴롭다. 신분은 학생이지만 자신도 성인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세뱃돈을 중학교 때 이후로 받지 않았다'는 김두리(23'여) 씨는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충분히 벌고 있는 만큼 이번 설에도 세뱃돈을 받지 않겠다. 부모님에게 10만원 정도를 드릴 생각이다"고 했다.

◆니가 세뱃돈 받을 나이가

가장 괴로운 사람은 경계인이다. 이쪽저쪽에도 소속되지 못한 재수생과 취업준비생들이다. 가뜩이나 명절 때면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하는 데 세뱃돈까지 요구하기에는 민망하다. 그러나 이들에게 세뱃돈은 더욱 절실한 현실적인 문제다.

삼수생 이모(20) 씨는 "삼수하고 세뱃돈은 별개다. 공부하는 데 이래저래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다"며 10만원 이상을 희망했다.

취업준비생 박태현(28) 씨는 설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라도 받았으면 했다. 박 씨는 "대학생들처럼 쿨하게 세뱃돈을 포기할 수도 없고 돈을 벌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손을 내밀기 부끄럽긴 하지만 돈의 문제가 아니라 복을 불러일으킨다는 상징적인 의미인 만큼 주면 받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사법시험을 준비 중인 김성수(30) 씨는 이번 설을 고시원에서 보내기로 했다. 김 씨는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는데 세뱃돈을 받기가 부담스럽다. 올해는 꼭 시험에 붙어서 내년에는 세뱃돈을 주는 입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세배했으니 달러 줄게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이모(47) 씨는 조카들 세뱃돈을 고민하다 '외화 세뱃돈'으로 결정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연수나 해외여행을 자주 다녀 외화에 익숙한데다 현금이나 문화상품권 등은 쉽게 사용할 수 있어 세뱃돈 본연의 의미를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두 자녀를 두고 있는 황모(40) 씨도 외국돈으로 세뱃돈을 주기로 했다. 저축과 화폐 소장가치 등을 가르칠 수 있는데다 우리나라 화폐와 다른 외화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이처럼 특별한 세뱃돈을 찾는 어른들이 많아지자 금융업계에서도 이에 발맞춰 외화세뱃돈 상품을 내놓으면서 현금에 국한돼 있던 세뱃돈 문화가 글로벌화되고 있다. 원화 강세 현상으로 예년에 비해서는 줄어들고 있지만 2달러, 20바트(태국화) 등이 행운을 가져다준다며 여전히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에는 '짐바브웨 100조달러' '황금흑룡지폐' 등 다양한 이색 지폐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 중앙 남부에 위치한 국가 짐바브웨의 100조달러는 발행 17일 만에 인쇄가 정지됐지만 '부를 가져다준다'는 속설로 인해 국내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5만원권의 인기도 여전하다. 2009년 처음 발행된 후 가장 원하는 세뱃돈의 지존으로 군림하고 있다. '돈보다는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저축 통장이나 도서상품권, 온라인 교육 사이트 수강권 등도 등장했으며, 넷세대인 아이들을 위해 전자화폐로 세뱃돈을 주는 가정도 생겨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유형의 세뱃돈이 등장하고 있지만, 우리의 세뱃돈 문화에서는 정작 의미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설 연휴를 즐기는 데 쓰라'는 용돈 성격만 강할 뿐 중국처럼 '올해는 재산을 많이 모으라'는 덕담의 의미까지는 담고 있지 않다.

세뱃돈을 주는 방식, 받는 방법에도 예의가 실종됐다는 비판이 있다. 일례로 중국과 일본, 베트남에서는 세뱃돈을 전용 봉투에 담아서 준다. 2040미래연구소 도건우 소장은 "세뱃돈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하고 세뱃돈을 주고받고 있다. 세뱃돈 풍습을 비롯해 설날 예의를 새롭게 확립하는 방안에 대해 다양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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