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의 집중 인터뷰] 이혁영 씨월드 고속훼리 회장

입력 2013-01-25 07:44:08

"경상도 사람이 목포에 온 지 40년, 호남 연안여객 선박왕 되었죠"

'목포(木浦)는 항구다.'

목포는 부산과 원산, 인천에 이어 1897년 개항, 올해로 개항 116주년을 맞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항구도시다.

목포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광주와 더불어 호남정치의 축을 지탱해 온 고색창연한 '정치도시'였다. 목포는 지금도 김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전 민주당 원내대표의 지역구라는 점에서 여전히 호남정서를 상징하고 있다.

전통적인 개항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목포를 대표하는 기업인으로는 '목포~제주' 고속훼리 여객선을 운영하고 있는 씨월드 고속훼리㈜의 이혁영(66) 회장이 꼽히고 있다. 이 회장은 제주와 목포 간을 오가는 스타크루즈호를 비롯한 4척의 고속 훼리를 보유하고 있다.

목포에서 40여 년째 연안여객 운송업을 하고 있는 이 회장은 그러나 '목포사람'이 아니다. 호남의 심장인 목포를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성장한 그는 놀랍게도 '경상도 사람'이다. 경상도 사람이 목포에 와서 '목포시민의 상'(2007년)을 받고 목포의 대표적인 기업인이 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목포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목포상공회의소 부회장에 이어 지난해 민주평통 전남지역회의 부회장으로도 선출됐다.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이와 관련, "경상도 사람인 이 회장이 목포에 와서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인이 된 것은 목포의 변화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동서화합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표현했다.

이 회장은 목포에서 '돈 많이 버는' 기업인이 아니라 꾸준하게 감동을 주고 있는 '기부천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목포에서 버는 돈을 지역사회에 되돌려주는 그의 한결같은 나눔경영에 목포가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지역 출신이 아닌 그가 복지재단을 세우고 소외계층을 돕고 격려하는가 하면 도서벽지와 산골 소년소녀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자, 한때 지역사회에서는 그가 정치에 꿈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정치권의 손짓에 전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제가 남들보다 더 많이 베푸는 것도 아닌데 '기부천사'라는 등의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진다. 예전에 목포가 워낙 못사는 곳이다 보니 우리 지역사회가 베푸는 삶에 인색했던 것은 사실이다. 박 전 원내대표도 (지역의) 돈 있는 사람들이 더 인색하다고 푸념하기도 한다. 저는 이웃과 지역사회와 나누는 삶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점을 좋게 봐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경북 상주(함창)가 고향인 이 회장은 대구에서 경북고, 경북대를 졸업한 후인 1974년 외삼촌이 시작한 연안여객선 사업을 도와주려고 목포에 왔다. 그후 이 회사의 CEO가 돼 경영을 해왔지만 연안여객선 사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오너는 서울로 떠나버렸다. 1992년부터 국제고속훼리 회사를 맡아 운영하던 그는 외환위기사태(IMF)를 앞두고 선박이 경매되는 위기 속에서 직접 회사를 인수, 카훼리 여객선에 과감하게 투자를 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을 펼쳐 씨월드 국제훼리를 국내 최대의 여객선 회사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가 '호남의 심장'이라는 목포에서 사업가로 성공하기까지는 고충이 엄청났을 것이다.

그는 "많은 수난을 겪고… 그랬다"며 잠시 말을 멈추고는 "좌절도 했지만 꿋꿋이 최선을 다하면 무엇인가 이루지 않을까 하고 열심히 한 결과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이라고 담담해 했다.

"제가 넘어온 1974년도만 해도 이쪽(목포)은 경제적으로 아주 열악했고 사회적으로도 험악한 도시였다. 영호남 간의 적대적인 감정이 심했던 시기였다. 가장 좋지 않은 시대에 왔지만 저는 '최선을 다하면 같이 어울릴 수 있지 않을까' 역으로 생각했다. 열심히 하면서 이 지역 사람들과 동화가 되고 귀감이 되면서 몇 년 전 '목포시민의 상'도 받고 지금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경상도 사람이 목포에서 사업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30년 전만 해도 참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우선 말투가 다르다 보니 가까워지기가 어려웠고 경쟁을 할 때는 '너는 경상도 사람 아니냐'며 제쳐놓았다. 사실 지역기업이라는 것은 그 지역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옛날에는 경상도 사람이 와서 우리 돈 다 가져간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들을 극복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10년 정도 그렇게 지나니 목포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지역사회를 생각한다'고까지 하게 됐다."

하긴 김 전 대통령도 목포에서 연안여객선 사업을 한 바 있다. 이 회장이 목포에 와서 사기를 당하기도 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겉보기에도 그는 독기 하나 없이 착한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는 "고향 친구들과 주변에서 '전라도에 가서 사업 잘 하고 잘산다는 소문이 났는데 망해서 깡통 차고 가면 사람꼴이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도 당해 보니까 여기서 경상도 사람의 이미지를 제대로 심으려면 다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자'고 결심했다. 그때부터 죽기 아니면 살기로의 심정으로 열심히 해 온 결과가 오늘이다."

그러면서 "지금 목포는 전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라면서 "나 같은 경상도 사람이 와서 사업도 잘하고 있고 전라남도에서 땅값도 제일 싼 곳이어서 투자하기에도 적합한 곳"이라며 목포 자랑에 열을 올렸다.

이 회장이 사업에 성공하게 된 것은 타고난 성실함과 미래를 내다보는 사업 안목 덕분이었다.

목포와 제주 항로의 여객선 사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하나 둘씩 철수하기 시작했고 규모가 큰 회사들은 카훼리를 도입,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섰다. 그가 운영하던 회사는 새로운 투자를 하지 못하면서 오너가 철수했다. 그래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기회는 IMF와 더불어 찾아왔다. 다른 선사들이 부도나고 손을 들면서 리스사들이 대여한 선박 회수에 나섰고, 제주 항로를 운영할 새로운 회사를 찾아 배를 넘기던가 경매에 부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에게는 기회였다. '이 회장이 성실하고 믿을 수 있다'는 명성을 전해 들은 리스사는 이 회장에게 선사를 운영해 볼 것을 제의했다. 담보 하나 없이 신용만으로 리스사는 그에게 선뜻 카훼리 선박을 내줬다.

"나를 믿고 맡겨달라, 3년 내에 선박 값을 갚겠다고 말했지만 리스사는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인수해서 정상화시키려고 몸부림을 쳤다. 서울과 부산, 제주와 목포를 하루 동안 돌아다니면서 마케팅을 하고 최선을 다한 결과 궤도에 오르게 됐고 IMF를 벗어나면서 3년 만에 선박 값을 갚았다.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고 KTX까지 개통되면서 여객수요가 한꺼번에 몰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2만t급 크루즈 여객선을 도입, 서비스 고급화에 나섰다."

제주-목포 항로를 운항하는 '바다위의 호텔'로 불리는 이 회사의 씨스타크루즈호(2만4천t급)는 마침내 2011년에 국토해양부가 선정한 전국 연안 여객선 고객만족도 평가에서 최우수 선박으로 뽑혔다.

지난해까지 4년 연속 경영대상을 받았고 또 국세청이 수여하는 성실납세자로도 선정됐다.

호화크루즈선을 비롯해 3시간 안에 제주도로 갈 수 있는 쾌속선까지 취항시키면서 그는 24시간 언제든지 제주도에 갈 수 있는 항로를 완성시켰다. 전략은 성공했다. 특히 4시간 30분 걸리는 승선시간 동안 선내에서 라이브공연을 보고 편의점과 커피숍 노래방 등을 이용하도록 한 호화크루즈선은 주말이면 표가 동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와 씨월드 고속훼리가 지금의 위상을 잡지 못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매년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목포 양동제일교회 경로대학 학생 650여 명을 초청, 제주도 관광을 시켜주는가 하면 목포의 차상위계층, 불우이웃, 소년소녀가장, 외국인 근로자, 다문화가정 등에 대해서도 봄, 가을에 제주도 여행 및 음악회 등을 열어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올해로 20년째가 된다.

산골 학생들을 초청해서는 바다를 보여주면서 야망을 가지라며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특히 어떤 주어진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서 유명한 정치인과 성공한 사람들 중에 산골 출신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면 굉장히 좋아한다고.

이 회장은 이제 새로운 사업을 꿈꾸고 있다. 연안 크루즈에서 벗어나 동남아 노선 크루즈 사업과 요트사업이 그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계산도 하고 미래도 예견했지만 두려움도 많았다"며 "그러나 용기있는 자에게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크루즈 사업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있다. 소득 3만달러 시대에는 크루즈 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지만 섣불리 뛰어들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요트산업은 전망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쪽에는 섬이 많이 있어서 지루하지 않은 요트 항로를 개발할 수 있어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도 했다.

그는 '목포는 항구다'가 아니라 '목포는 예향'이라며 목포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자그마한 식당에도 그림 한 점씩은 걸려 있고, 목포 사람 누구라도 가락 한마당씩은 뽑을 줄 아는 살기 좋은 목포는 더 이상 구석진 곳에 위치한 낡은 도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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