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에도 지배층은 의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은 열두 살 나이로 즉위하던 해인 1452년 9월 9일 예조에 이렇게 지시했다.
"의술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아니한데, 모름지기 방서(의약에 관한 책)에 두루 통한 뒤에야 약을 쓰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지금 의원으로서 방서를 아는 자가 적고 대개 보고 들은 것으로 약제를 쓰니, 이로 인해 인명을 잘못 상하게 한다. 예조와 삼의사(제생원'전의감'혜민국을 합쳐 부르던 말) 제조(책임자)는 학식이 뛰어나고 영리한 양반집 자제 10명을 뽑아 의원으로 교육시키라." 이들을 '습독관'이라고 불렀고 교육을 마치면 임시직을 주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의사의 지위는 현재와는 사뭇 달랐다. 의술은 천한 것이었고 양반이 배워서 의관이 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런 의식이 팽배한 탓에 비록 왕의 명령이었지만 습독관 제도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사기가 떨어진 습독관들이 의술을 익히고도 그만 두거나, 다른 직업을 구하기 위해 과거에 응시하는 경우가 수시로 벌어졌다.
때문에 겨우 6년 뒤인 1458년(세조 4년) 결국 문제가 벌어진다. 의학 책임자는 임금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한다. 당시 기록을 쉬운 말로 옮겨보면 이렇다.
"의업을 하는 사람이 적고 기술도 올바르지 못한 것을 염려해서 양반 자제 중 어리고 영리한 자를 가려서 습독관으로 삼아 의약서를 읽게 하고 임시직도 주었다. 나름대로 격식을 갖춰 습독관을 장려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의술을 천한 것으로 여기다보니 습독관이 자리를 받고난 뒤에도 문득 태만한 마음이 생겨서 갖가지 이유를 핑계로 이를 벗어날 기회만 엿본다."
핑계거리도 다양했다. '돌아가 늙은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 병에 걸렸다, 상(喪)을 당해 삼년상을 마쳐야 한다'는 등등. 문제는 제법 심각했던 모양이다.
책임자는 대책을 아뢴다. "이런 이유가 없어지면 다시 원래 하던 일로 돌아오게 해서 다른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혹시 높은 관직을 받았거나 과거에 급제해도 원래 하던 일을 계속하게 하고, 벼슬자리를 옮길 때마다 의학 책임자가 매긴 근무평점을 적용시켜서 잘하는 사람을 등용하고 못하는 사람을 내쫓는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자는 죄를 물어야 합니다."
세조는 그렇게 따르라고 지시했다. 생명을 다루는 의술은 높이 샀지만 이를 실행하는 의사는 천대했던 조선의 양반들. 이들이 보여준 모순은 의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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