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에 '쏙'…사람도 기계도 '슬림'에 목맨 세상

입력 2013-01-19 07:32:24

IT제품 "얇게 더 얇게" 기술력 과시 조건으로…몸매도 패션도 '극

두께 10㎜대까지 진입한 요즘 노트북.
두께 10㎜대까지 진입한 요즘 노트북.
점점 얇아지고 있는 최신 스마트폰.
점점 얇아지고 있는 최신 스마트폰.
최근 TV업계의 화두는
최근 TV업계의 화두는 '더 선명하게, 더 크게, 그리고 더 얇게'다.

'한 손'에 잡혀야 한다. '쏙' 들어가야 한다. '있는 듯 없는 듯' 공간을 최대한 적게 차지하는 것은 물론 '날씬한 몸매'로 시선도 만족시켜야 한다. 언제부터일까? 인간은 '두께'와 '굵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얇아져라. 가늘어져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과학기술과 디자인, 그리고 세상의 가치를 논하는 인식이 점점 그렇게 변화하고 있다.

◆슬림 스타일 전성시대

직장인 김민정(31'여'대구 동구 율하동) 씨는 지난 10년간 노트북을 세 차례 바꿨다. 스무 살 때 대학 입학 기념으로 부모님이 사 준 것, 스물여섯 살 때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구입한 것, 그리고 두 달 전 구입한 최신 '울트라신'(ultra+thin) 노트북까지. 점점 기능이 향상된 것은 물론이고, 두께도 점점 얇아진(덩달아 무게도 가벼워진) 것이 핵심이다.

그러고 보니 김 씨의 패션도 비슷하게 변화했다. 대학 신입생 때는 헐렁한 백팩에 헐렁한 셔츠 및 면바지를 입는 캐주얼 스타일이 유행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가방 폭은 좁아지고 네모 반듯한 격식을 갖추게 됐다. 그리고 요즘 여성 패션은 스키니 팬츠나 레깅스가 기본 아이템이다. "노트북도 액세서리에요. 매일 들고 다녀야 하는데 요즘 기본인 '슬림' 패션에는 두께가 가벼운데다 최대한 얇은 노트북이 어울리죠. 가방 디자인도 얇은 노트북 사이즈에 맞춰 나와요,"

요즘 노트북 업계에서는 '신'(thin)이 대세다. 얇고, 가늘다는 뜻이다. 모든 브랜드가 일명 울트라신 제품군 마케팅에 주력하고 있다. CPU'메모리칩'하드디스크 등 각종 전자부품들이 점점 작아졌고, 성능은 엇비슷해졌다. 또 컴퓨터 사용에 필요한 데이터를 서버에서 전송받아 사용하는 '클라우드 컴퓨팅'이 자리 잡으면서 CD롬 등 보조 장치가 아예 필요 없어졌다. 결국 누가 더 얇고 가벼운 디자인을 구현하느냐가 관건인 상황.

상용화된 제품은 아니지만 영화에서나 보던, 종이처럼 휘는 컴퓨터도 최근 개발됐다. 이달 8일 캐나다 퀸즈대학'플라스틱 로직사'인텔 연구소가 함께 개발해 발표한 것이다. 개발에 참여한 인텔의 한 관계자는 "10년 이내에 모든 컴퓨터가 '플렉서블 디스플레이'(종이처럼 휘는 화면) 형태로 바뀌고, 덩치 큰 IT 기기로 가득하던 사무 환경도 변혁을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IT 제품 업계는 '두께 전쟁' 중

'삼성전자가 두께 18㎜의 세계에서 가장 얇은 '초박형' 휴대전화를 개발했다. 두께를 얇게 하기 위해 내부 기판을 2개에서 1개로 줄이고, 부품을 고집적화했다.' 1999년 3월 3일 한 신문기사 내용이다. 당시 18㎜가 가장 얇은 휴대전화 두께였고, 언론보도나 광고카피('18미리의 감각, 18미리의 유혹')에서도 두께를 가장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두께 경쟁'은 사실 IT 제품 업계 전반의 경향이다. 스마트폰이 대표적이다. 성능이 어느 정도 엇비슷해지면서 얇은 디자인으로 경쟁하는 경향은 일명 '피처폰'(스마트폰 이전의 휴대전화 제품군) 시절부터 지금의 스마트폰 시대까지 일맥상통한다. 1983년 모토로라가 내놨던 세계 최초의 휴대폰 '다이나택'의 두께는 45㎜였다. 이달 열린 세계 최대가전전시회 'CES 2013'에서 프랑스 스마트폰 업체 알카텔이 선보이며 세계에서 가장 얇은 스마트폰으로 인정받은 '원터치 아이돌 울트라'의 두께는 6.56㎜다.

전자부품의 초박화 외에 스마트폰 두께 경쟁의 관건으로 떠오른 것이 화면용 유리와 배터리의 초박화다.

스마트폰 화면용 유리는 일명 '신(thin)글라스' 공정을 거친다. 말 그대로 유리를 얇게 만드는 것이다. 유리판을 최대한 얇게 깎으면서 '터치' 기능이 가능한 특수 필름을 씌워야 하기 때문에 초정밀 기술이 요구된다. 자판이 따로 있던 피처폰 시절에는 굳이 신글라스 공정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최근 스마트폰 시장이 커지면서 전자부품 제작 공정만큼 중요해졌다.

최근 국내 연구진은 세계에서 가장 얇은데다 휘어지는 고성능 배터리를 개발했다. KAIST(한국과학기술원) 이건재 교수팀은 지난해 머리카락 두께 10분의 1 정도의 배터리를 개발했다. 곧 스마트폰'태블릿PC 등 각종 이동형 IT 제품에 상용화할 수 있을 전망이다.

◆한 듯 안 한 듯 '생얼 메이크업'

최근 한 뷰티 브랜드에서 기업 인사담당자들에게 물었더니 60%가 "여성 지원자의 인상을 보고 감점 처리한다"고 답했고, 구체적인 이유로 '진한 메이크업'이 26.4% '꾸미지 않은 얼굴'이 10.9%를 차지했다. 면접관들은 "밝고 투명한 메이크업에 호감이 간다"고 답했다.

비단 취업 면접장만의 상황일까? 우리 사회 전체가 그런 분위기다. 핵심은 얇은 메이크업으로 피부 잡티는 가리면서 밝고 투명한 매력을 풍기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각종 메이크업 제품이 수년 전부터 인기다. 비비크림이 중심에 있다. 정식 명칭은 '블레미시 밤'. 원래 독일에서 피부과 치료 후 피부 보호 및 재생을 목적으로 사용하던 제품이다. 따로 복잡한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비비크림만 발라도 잡티를 가려주고 피부 톤을 정리해주는 효과가 뛰어나 연예인들이 먼저 사용했다. 2000년대 초반 비싼 수입 제품만 있던 것이 2000년대 중반부터 저렴한 국산제품이 등장, 대중화돼 누나'이모'엄마 모두가 바르게 됐다. 이제는 한 듯 안 한 듯 '생얼 메이크업'의 필수 요소가 됐다.

국내 뷰티업계에서는 지난해 가을'겨울에 파운데이션 컬러를 활용한 '누드 메이크업'이 강세였다면 올봄'여름에는 피부 잡티마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드러내는 '투명 메이크업'이 강세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물론 무방비로 '생얼'을 노출하는 것은 아니란다. 기존 비비크림에서 진화한 일명 '누드 비비크림' 제품을 사용하고, 파운데이션을 더욱 얇게 덧바르는 등 고성능 제품에 절묘한 메이크업 기술이 필요하게 됐단다.

◆'극세사' 몸매에 슬림 패션

메이크업이 두께에 골몰한다면 몸매는 굵기가 화두다. 일명 '극세사' 몸매가 요즘 대세다. 극세사란 '몹시 가는 실'을 뜻한다. 이를 주로 여성 연예인들의 날씬한 허벅지'종아리'팔뚝 등을 보고 비유해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선망해 운동이나 다이어트보다 효과가 빠른 '시술'로 극세사 몸매를 만들려는 여성들이 성형외과를 많이 찾고 있다. 종아리나 팔뚝의 근육을 위축시켜 그 두께를 줄이는 '보톡스' (보툴리늄 톡신) 시술이 대표적이다. 이전에는 주로 얼굴 부위에 하던 보톡스 시술이 몸 전체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몸에 칼을 대는 '수술'이 아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부담 없이 찾고, 특히 시술 시간이 짧아 팔뚝 등 드레스 몸매를 급히 갖춰야 하는 예비신부들이 적잖게 찾고 있단다.

패션도 슬림 디자인이 대세다. 두껍게 '꽁꽁' 싸매 입던 겨울에도 이제는 얇게 입는다. 발열'보온 기능을 갖춘 의류 소재가 꾸준히 개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웃도어 제품에만 적용되던 기능성 소재가 평상복에도 적용되면서 자연스럽게 대중화되고 있다. 햇볕에 노출되기만 해도 열을 내거나 땀을 흡수해 열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소재 등 다양하다.

더욱 얇아지고, 더욱 따뜻해진 내복의 발전도 주목할 만하다. 더 이상 겉옷 맵시를 망치지 않아 젊은이들도 즐겨 입게 됐고, 에너지 절약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돕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학생 박모(24'여) 씨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SPA(패스트 패션) 브랜드 매장마다 맨 앞에 세련된 디자인은 물론 기능성을 갖춘 패션 내복을 내놓고 판매한다. 친구들도 스타킹이나 레깅스처럼 자연스럽게 입는다"고 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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