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안의 아리랑 이야기] 아리령·아로롱·아라릉 표기…조선중기 이후 여러 곳 등장

입력 2013-01-10 07:29:37

(4) 초기의 문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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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rung'악보, 채보: H. Hulbert (1896)

# 1896년 미국인 헐버트 서양 악보로 옮긴 첫 기록

오랜 세월을 거쳐 구비 전승되어 온 아리랑이 처음 문헌에 소개된 것은 조선 중기부터이다. 남사고(南師古)의 '격암유록'에 "亞裡嶺有停車場 苦待苦待多情任"(아리령유정거장 고대고대다정임)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것은 '아리 고개에 정거장이 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다정한 님'이란 뜻으로 험난한 고개를 넘어 안식처가 있는 곳을 가리킨다. 영조 때 이승훈의 '만천유고'에 "啞魯聾 啞魯聾 於戱也(아로롱 아로롱 어희야)"가 실려 있는데 농부들이 부르는 '아로롱'을 한문으로 옮겨 적은 것이다.

아리랑이 본격적으로 문헌에 등장한 시기는 조선 후기 경복궁 중수 때부터이다. 경복궁 중수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강제로 거두어들인 원납전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담긴 노래가 유행했다. "但願我耳聾 不聞願納聲(단원아이롱 불문원납성)"은 '차라리 내 귀가 먹어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못 들었으면 좋겠다'라는 뜻이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에서 "임금은 매일 밤마다 전등불을 켜놓고 광대들을 불러 신성염곡을 연주케 했는데 그것이 '아리랑타령'이다"라고 했다. 민영주는 이것을 부르는 광대들의 실력을 평가하여 상을 내렸는데 1984년 일본인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궁궐을 침범할 때까지 계속돼 당시 궁궐에서도 아리랑이 상당히 인기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외국인이 남긴 중요한 기록은 아리랑을 최초 서양 오선보로 옮겨놓은 악보자료다. 구한말 조정의 육영공원 교사로 국내에 들어왔던 미국인 헐버트(H. Hulbert)가 1896년에 쓴 'The Korean Repository'에 한양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아리랑타령'을 'A-ra-rung'이라는 제목으로 해석과 함께 서양 오선보에 실었다. 헐버트는 "이 곡은 10년 전부터 야간에 공연되어 왔으며, 1883년 대중에게 가장 큰 인기가 있었다. 782절로 이루어진 '아라릉'이 한국인에게 음식에 있어서 밥이 차지하는 것과 같다"며 당시 아리랑의 인기와 한국인에게 아리랑의 소중함을 기록했다.

같은 해 7월 미국의 여류 인류학자 플래쳐(A. Fletcher)는 워싱턴에서 조선사람 안종식과 양손이 부른 아리랑(Love Song: Ar-ra-rang)을 녹음했다. 이 아리랑도 악보상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당시 한양에서 유행했던 '아리랑타령'이다.

1908년 6월 대한학회월보(5)에 최명환은 아농가(我農歌)의 '아르렁타령'을 "我農焉 我農焉 我我利(아농언 아농언 아아리)"라고 적었는 데 '내 농사여 내 농사여 나의 이로움이여'로 직역된다. 1914년 이상준은 '아리랑타령'을 서양 오선보로 기보해 '조선속곡집'(1914)에 발표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 중기부터 간헐적으로 문헌에 등장한 아리랑은 조선 후기부터 1926년 나운규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이 나오기 전까지 '아리랑타령'이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이 아리랑은 악보에서처럼 당시 한양지역에 널리 유행된 '경기자진아리랑'이었다.

유대안<작곡가·음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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