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임진왜란·항일투쟁…애국의 중심은 대구였다
대구가 가진 특유의 정신이 하나 있다. 이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가짐을 1천300여 년 이상 올곧게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고려-조선-일제강점기-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긴 역사에서 대구는 나라를 지키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고려 때 몽고침략 항쟁, 조선시대 임진왜란'정유재란 의병활동, 구한말~일제강점기 의병'항일운동, 6'25전쟁 때 자유민주주의 수호 등 대구는 말 그대로 호국(護國)도시였다. 대구사랑 대구자랑 자문위원인 조해녕 전 대구시장은 "임진왜란엔 의병, 일제강점기에는 독립투사가 많이 나왔고 6'25 때엔 나라를 지킨 곳이 바로 대구"라며 "대구=호국충절의 고장이란 등식이 성립한다"고 했다. 경상도가 충(忠)'효(孝)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적 전통이 강한 곳이어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애국인들이 많이 배출되지 않았나 싶다.
◆국내 유일 애국지사묘지공원, 신암선열공원
대구가 호국의 도시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곳이 있다. 대구 동구 신암5동에 있는 신암선열공원이다. 넓이가 3만6천800㎡인 이곳엔 대구 출신 애국지사 52분의 묘소가 있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공원으로는, 국내에서 신암선열공원이 유일하다. 본래 애국지사 묘소는 대명동 시립공원에 있었으나 1955년 대구대학교가 들어서자 지금 위치로 이전했다. 이후 묘지성역화사업에 의해 1987년 3월 1일 선열공원(先烈公園)으로 조성됐다. 의병운동, 3'1운동, 광복군 등 항일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들이 안장돼 있다. 박동욱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장은 "신암선열공원은 대구가 호국도시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라며 "대구는 외침이 있을 때마다 의병을 일으키고 국채보상운동, 3'1운동 등 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도시"라고 강조했다.
◆길이길이 빛나는 국채보상운동
1907년 1월 대구에서 담배를 끊자는 단연회(斷煙會)가 조직된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 진 빚 1천300만원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서상돈, 김광제를 중심으로 대구에서 태동한 이 운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됐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년간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이 됐다. 우리 역사 5천 년 최초의 국민운동이었다. 또한 후일 신간회가 주도한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김영호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은 "국채보상운동은 구한말 나랏빚을 직접 채무자도 아닌 일반 국민들이 대신 갚겠다고 일어난 외채 갚기 운동"이라며 "양반'유생들은 물론 평민, 상공인, 기생, 거지 등이 참여한 한국 최초의 시민운동이자 최초의 전국적 기부운동"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부녀자들이 대거 참여한 한국 최초의 여성운동이란 평가도 받고 있다. 김 회장은 "국채보상운동은 채권국의 '부추김과 꾐'을 고발하고, 비판한 전 국민적 외자 경계운동이기도 했다"며 "외환위기 직후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군 금 모으기 운동은 신(新)국채보상운동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3'1운동과 항일운동
한 해 방문객이 6만 명을 넘어서며 대구 대표 브랜드가 된 대구 중구 근대골목. 이 골목에도 대구 사람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다.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한 이상화 시인과 그의 형으로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이상정 장군의 고택을 각각 만날 수 있다.
또한 근대골목에서는 3'1운동의 우렁찬 함성을 들을 수 있고, 불꽃처럼 뜨거운 애국혼을 느낄 수 있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는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이날 서문시장에 몰려든 8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구 중심가를 누볐다. 그들이 행진한 곳 중의 하나가 근대골목에 포함된 3'1운동길이다. 3월 8일 하루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람이 157명에 달할 정도로 3'1운동의 불길은 대구에서 활활 타올랐다.
3'1운동과 함께 대구는 다양한 방면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다. 대동청년단,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 독립운동단체가 대구를 무대로 활동했다. 또 유림단(儒林團) 독립청원운동, 신간회 대구지회 활동, 의열단 무력항일운동,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 무우원'태극단 활동, 대구 24부대 학병의거 등 수많은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대구의 애국지사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대한민국 보루, 대구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있을 수 없다지만 만약 6'25 때 대구가 북한 공산군에 함락됐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대구 함락은 곧 부산 함락을 가져왔을 것이고, 그렇게 됐다면 출범 2년도 안 된 대한민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산군의 공세에 밀린 정부는 대전을 거쳐 1950년 7월 16일 대구로 수도를 옮겼다. 대구시내 각급 학교를 비롯한 여러 시설은 군기관에 전용됐다. 북쪽으로부터 밀려오는 피란민의 유입으로 빈터나 유휴지뿐만 아니라 개인 주택, 공공시설은 물론이고 심지어 도로까지도 점유됐다. 그야말로 대구는 폭발할 지경이었다. 7월 21일 대구 계성중학교에서는 침략을 규탄하는 궐기대회가 열리고 27일 문화극장에서는 임시국회가 소집됐다. 그리고 각 동별로 자위대가 조직되고 학도호국단에서는 학도의용군을 편성해 속속 전투에 참가했다. 대구가 공산군에 맞서 싸우는 주축기지로 떠오른 것이다. 적군의 박격포탄 3발이 태평로 2가 판자촌에 떨어졌지만 대구는 의연하고 꿋꿋했다. 대구 시민들은 피란길에 나서지 않고, 적의 포화로부터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지렛대 역할을 다했다. 민족의 정신무장, 양식 절약, 생활의 간소화를 호소하는 전시국민생활요강을 토대로 대구 시민들은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보루(堡壘)가 됐다.
◆'견위수명' 도시
왜적의 침략으로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이던 1596년(선조 29년) 9월 15일. 영남 유림 출신 의병장 32명이 팔공산 상암에 집결해 왜적 토벌의 결의를 다졌다. 이른바 팔공산 상암 회맹(八公山 上庵 會盟)이다. 많게는 수백 명에서 적게는 수십 명의 의병을 이끌고 모여든 의병장들은 자신의 자(字)를 소재로 오언구(五言句)의 희연시(戱聯詩)를 지어 돌아가며 낭송을 했다.
이들은 팔공산 산세와 인근 고을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수차례에 걸쳐 왜적을 격퇴했다. 각 향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면 회맹 의병장들과 연합작전을 펴기도 했다. 정유재란(1597년) 때는 이들 의병장 대부분이 군사를 이끌고 창녕 화왕산성에 입성해 곽재우 장군과 함께 성을 지키고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해 무찔렀다. 상암 회맹 의병장들은 더러는 전장에서 최후를 맞았고, 더러는 전란 후 수습에 나섰다. 이름 없이 역사의 그늘에 묻히기도 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을 고스란히 실천한 것이 바로 대구 사람이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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