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기억을 뒤지다 빛나는 추억과의 조우…장롱 속의 재발견

입력 2012-12-29 08:00:00

아담한 옛날 장롱 속에는 옷가지며 버선이며 침구류 등 다양한 생활 소품들이 정겹게 자리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아담한 옛날 장롱 속에는 옷가지며 버선이며 침구류 등 다양한 생활 소품들이 정겹게 자리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선조들의 가장 소박한 수납장이었던
선조들의 가장 소박한 수납장이었던 '고리짝'.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장롱'은 장과 농을 합친 말이다. 장과 농은 구조적으로 엄연히 다르다. 장은 몸체가 하나다. 반면 농은 한 층 한 층 따로 분리되며, 양 옆에 들쇠를 달아 쉽게 포개어 쌓을 수 있도록 했다. 요즘 유행하는 조립식 가구와 닮았다.

안방이나 사랑방에 자리한 장롱에는 주로 옷이나 이불을 넣었다. 이외에도 음식과 식기를 보관하면 찬장, 책을 넣어두면 책장, 머리맡에 두고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장은 머릿장(같은 말로 애기장 혹은 버선을 주로 넣어둔다는 의미로 버선장이 있다)이라고 불렀다.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장롱

사실 장롱은 살림이 넉넉한 집안에서나 둘 수 있었다. 장롱의 모서리 등을 보강하는 금속인 장석에는 점차 장식의 의미를 부여했다. 더 나아가 부유층은 자개(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잘게 썰어 가구에 붙여 장식하는 것)나 화각(쇠뿔을 얇게 펴서 채색 그림을 그린 다음 가구에 붙여 장식하는 것) 기법으로 장롱을 화려하게 꾸몄다. 하지만 가난한 서민들은 장롱 대신 작은 고리짝(버드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납작한 상자)이나 채롱(버드나무 가지를 엮어 상자 모양으로 만든 다음 안팎에 종이를 여러 겹 바르고 가죽을 덧대 박음질한 것)을 썼다.

장롱은 신부가 시집갈 때 시댁에 들고 가는 필수 혼수품이었다. 신부 측 집안의 가풍을 반영했다. 지금은 혼수품 종류가 다양해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롱은 결혼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먼저 꺼내는 소재였다. MBC 농촌드라마 '전원일기'의 1989년 11월 방송분을 보면 막내딸을 시집보내게 된 어느 집안의 어르신이 혼수 장롱을 고르기 전 김 회장(최불암) 댁 며느리들의 장롱을 구경하러 온다. 김 회장의 막내며느리는 어르신이 자신의 장롱을 보고 촌스럽다고 한 것에 기분이 나빠 친정에 전화를 걸어 새 장롱을 사달라고 투정을 부린다. 요즘 광고 카피로 '침대는 과학이다'가 있다면 장롱은 취향과 경제력이 투영되는 '자존심'이었던 셈.

이런 모습은 요즘 보기 힘들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혼수품에 더욱 신경 쓰게 됐기 때문이다. 1996년 9월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신세계백화점이 5천125쌍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혼수품 구입 경향을 조사했더니 당시로는 대형이었던 29인치 TV와 대형 냉장고'오븐형 가스레인지 등 값비싼 대형 제품이 인기였다. 반면 장롱은 묵직한 고가품보다는 저렴한 조립식 소형 제품을 찾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택에 옵션으로 포함된 붙박이장이 유행하면서 장롱은 굳이 구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더구나 주택난에 내 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자주 이사를 다니는 가구가 많아지면서 크고 무거운 장롱은 기피 가구 목록에 올랐다.

◆장롱은 보물 창고

점점 힘을 잃고 있는 처지의 장롱이지만 한때 큰 힘을 발휘한 적이 있다.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들이닥친 외환위기 때다. 장롱 속에 잠들어 있던 아기 돌 반지'금목걸이'결혼패물 등 온갖 금붙이를 토해내 외환 부채를 갚는 데 일조한 '금모으기 운동'이다. 당시 350여 만 명이 참여해 약 227t의 금이 모였다. 귀중품은 장롱 속에 보관하는 풍습이 계속 이어진 까닭에 나올 수 있었던 사회상이다.

지금도 장롱을 뒤져보면 콘텐츠의 힘을 발휘할만한 것들이 꽤 나온다. 지난 9월부터 서울역사박물관은 시민들로부터 근'현대 서울의 성장 모습이 담긴 '생활유산'을 기증받고 있다. 박물관에 전시될 '역사적 가치'를 담은 물품들은 이렇다. 50여 년 전 혼례 때 입었던 모시 적삼, 큰아들 돌 때 입혔던 색동저고리, 1978년 국세청이 발행한 주택복권 교환권,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 모자 등 모두 기증자들이 장롱 속에 고이 보관했다고 밝힌 것들이다. 박물관 측은 "별 가치 없어 보이는 물건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살아온 기록이 되고 후손들에게 흥미로운 유산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장롱을 뒤져 나만의 디지털 박물관도 설립 가능하다. 재생 기기가 단종돼 다시 보기 어려워진 결혼식, 자녀의 재롱잔치 등 추억의 영상이 담긴 VHS 비디오테이프를 디지털 파일로 복원해주는 서비스가 온'오프라인을 찾아보면 많이 있다. 변색되거나 훼손된 흑백 사진을 컬러 이미지 파일로 복원해주는 업체들도 있다.

올해 유행한 패션은 이렇다. 봄'여름에는 꽃무늬가 원피스'치마'셔츠 등 여성 패션을 지배했다. 그러더니 가을'겨울에는 일명 군복 개구리 무늬라 불리는 카모 패턴이 야상'점퍼 디자인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물론 외국에서 먼저 시작돼 국내로 들어온 유행이지만 장롱을 뒤져봐도 수십 년 전 어머니, 아버지가 입던 패션에서 같은 디자인을 발견할 수 있다.

장롱에서 끄집어내 새로운 트렌드로 재생산하는 복고 패션이 매년 유행하고 있다. 올해 꽃무늬와 카모 패턴은 물론 몇 년 전부터 헐렁한 배기팬츠, 상'하의 모두 청소재로 입는 청청패션, 스쿨룩 등이 매년 '복고'라는 이름을 달고 패션업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것.

경기 침체가 지속되며 일명 '장롱 자격증'을 꺼내 재취업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지자체 등에서 시행하는 자격증 관련 재교육을 받고 현장에 뛰어드는 주부들이 많다. 교원자격증을 가진 경우 나이가 들고 학교 환경도 변해버려 교사 대신 상담사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간호사들도 40, 50대에 재취업하는 경우가 많다. 대한간호협회의 올해 발표에 따르면 퇴직 간호사 10명 중 7명이 육아 및 가사를 이유로 일터를 떠났다가 비교적 육아에서 자유로운 중년 시기에 현장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재취업 이유로 경제적 이유(36%)도 컸지만 자아실현(39%)이 가장 많았다.

장롱 속에는 무형의 콘텐츠도 있다. '이야기'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장롱이 대물림 된 까닭에 속에 깃든 이야기도 함께 전승된 것이다. 상주박물관은 2009년 '장롱 속 한평생, 우리 할매 시집 이야기'전을 열었다. 할머니들이 수십 년 동안 장롱 속에 보관했던 저고리'버선'편지 등을 전시했고, 살아온 이야기도 구수한 사투리로 전달했다. 전시가 끝난 뒤 전시 내용을 담은 같은 제목의 책이 발간됐다.

배영동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는 "장롱은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다. 장롱 맨 위에 삼신을 모셨다. 그래서 주부들이 장롱 앞에서 무언가를 빌며 집안의 안녕을 간절히 기원했다"며 "주부의 삶과 장롱은 뗄 수 없는 관계였다"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