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축복받은 것이다. 일부 예언처럼 2012년 12월 21일에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 신문도 멀쩡하게 만들어지고 있으며 독자들은 별 탈 없이 글을 읽고 있을 테니 말이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 일인가. 그런데 이렇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하는 소위 종말의 예언들이 지구촌 곳곳에는 거의 매년 있어 왔다고 한다.
사실 이런 종말론은 인류의 오랜 화두 중 하나다. 종말론의 기원은 성경의 요한계시록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근래에는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7월 종말론'과 지난 세기 말에 새 천년을 앞두고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 '밀레니엄 버그 Y2K 종말론'이 요란했다. 국내에서는 1992년 다미선교회의 휴거(携擧) 소동이 우리 기억에 남아 있다. 만일 그중에 하나라도 맞았더라면 내가 지금 이렇게 편히 앉아서 글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번의 2012년 종말론은 '고대 마야 문명의 달력' 때문이다. 마야의 달력이 기원전 3114년 8월에 시작하여 기원후 2012년 12월 21일에 끝난다는 것이 그 소문의 배경이다. 그야말로 논리적인 근거도 없거니와 종교적으로도 전혀 근거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러한 근거 없는 심리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그 불안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2012년에 종말이 닥치는 영화를 만든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심지어 개인 방공호와 피난처까지 판매하고 있어 일부 국가에서는 엄격하게 대처하기로 했단다.
외국의 일부에서는 이렇듯 난리인데 우리나라의 조사내용이 재밌다. 최근 성인 남녀 2천175명을 대상으로 종말론에 대해 물은 결과 74%의 응답자가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런데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지금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가?'라고 물은 결과, 응답자가 첫 번째로 꼽은 것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였고, '지구 멸망 전 마지막 식사를 하고 싶은 사람'으로도 역시 '가족'을 선택한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지구가 멸망하는 순간 가장 후회하는 것으로는 '열심히 사랑하지 못한 것'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고 그 뒤로 '가족에게 애정표현 못한 것' '부모님 속을 썩인 것' 등의 답변이 이어졌다.
그동안의 종말론들은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어쩌면 우리로 하여금 잊고 살았던 소중한 것들을 한 번쯤 되돌아보게 하는 순기능도 있을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처럼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가장 좋은 대처방법일 것인데, 현명한 우리 국민들은 더불어 소중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다가오는 연말연시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자. 그리고 제발 이 글을 신문에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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