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월포리 물회

입력 2012-12-20 14:21:20

어부들과 함께 먹던 소박한 맛…그 맛이 그리워

생선회 중에서도 물회를 만난 건 아마 서른 즈음이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어차피 물회상을 펼쳐놓고 보니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조간신문을 펼쳐보니 한반도 지도에 고속도로 망이 그려져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닦은 후 남해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 세상에는 노력과 연습 없이 이뤄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자전거타기와 헤엄치기가 그렇고 외국어 회화와 골프를 비롯한 모든 운동이 그렇다. 아무리 천재적인 소질을 가졌더라도 반복적인 연습과 노력 없이는 목표하는 바를 이룰 수가 없다.

운동과 공부만 그럴까. 음식도 이 범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가령 내륙 깊숙한 시골에서 태어나 한 번도 생선회를 먹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회 먹기를 즐기기는커녕 먹는 것 자체를 꺼린다. '아는 것만큼 보이듯이 먹어 본만큼 먹을 줄 아는 게' 진실이다.

회식 자리에 근사한 생선회 쟁반이 올라왔는데도 간고등어 자반쪽에만 젓가락질을 하는 사람은 고향이 충청도이거나 경북 내륙의 기차역이 없는 산골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특이한 사람도 더러 있다. 태어나서 장성할 때까지 바다 구경을 못한 시골뜨기가 생선회가 올라오기가 바쁘게 먹어 치우는 이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 사람을 보면 완도 출신 최경주 선수가 미국 PGA를 제패한 것이나 다름없이 느껴져 혼자 웃음을 참지 못한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가서 경주 토함산에 올라 해 뜨는 아침 바다를 처음 보았다. 생선회는 대학에 들어가서 오징어, 가오리, 병어가 같은 쟁반에 담긴 삼류 모듬회를 막걸리와 함께 처음으로 먹어 보았다. 세상에! 초고추장을 찔끔찔끔 부어 비빈 그것들이 그렇게 맛이 있을 줄이야.

생선회 중에서도 물회를 만난 건 아마 서른 즈음이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어차피 물회상을 펼쳐놓고 보니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조간신문을 펼쳐보니 한반도 지도에 고속도로 망이 그려져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닦은 후 남해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남해 다음에는 현재 빈칸으로 남아 있는 강릉에서 포항 간 고속도로가 다음 차례로 단연 유망할 것 같았다. 무릎을 탁 치며 일어섰다. '바닷가에 땅을 사는 거다.' 매월 5천원씩 붓던 20만원짜리 적금을 해약하여 주말마다 바닷가로 뛰어다녔다. 그건 마치 세르반테스의 소설에 나오는 어설픈 돈키호테 모양 그대로였다.

그 액수는 평당 5천원짜리 땅 40평을 살까 말까 한 돈이었다. 돈키호테는 긴 칼을 들고 풍차를 향해 돌진했지만 나는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주말마다 바닷가로 달려갔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월포란 동네의 유지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주말마다 내려오시오, 회는 내가 살터이니." 그분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나의 끈기에 감동한 듯 내가 인사하고 들어가면 생선회와 술이 뒤따라 나왔다.

바닷가로 나다닌 지가 서너 달이 지났지만 땅은 한 평도 사지 못하고 겨울이 지나갔다. 대신에 그 동네 어른들과 안면을 트고 앞바다에서 잡히는 생선은 원도 한도 없이 실컷 먹었다. 당일치기 바다 행이 1박2일로 늘어났고 우리 가족이 몽땅 그 집 방 한 칸을 차지해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친분이 도타워졌다.

하루는 월포 앞바다에 쳐둔 정치망에서 고기를 잡는 총대장인 어로장 재만 형이 "물회 먹어 봤어"한다. "아뇨" "그러면 내일 아침에 바라 소주(병마개 없는 하급 대병 소주) 몇 병 들고 어막(魚幕)으로 와"한다.

다음날 아침 유지 어른과 함께 어막으로 갔다. '물 보러 가는'(그물에 걸린 고기를 건지러 가는) 어부들이 잡어를 썰어두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은 대접에 막회 한 움큼과 식은 밥 한술을 넣고 고추장을 듬뿍 얹더니 찬물을 붓고 그걸 마셔보라고 했다. 이른바 그 게 어부들이 물 보러 가기 전에 해장술 한 잔과 함께 마시는 물회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험한 음식과 남들이 먹을 염을 못 내는 괴상한 음식도 잘 먹는 몬도가네식 식성을 가졌기 때문에 물회 한 그릇 마시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어부들과 친해지는 통과의례였다.

그날 이후 주말에 월포에 내려가기만 하면 반드시 어부들과 함께 물 보러 간다. 간밤에 마신 술이 과해 진작 따라 나서지 못하면 재만 형이 횟거리를 챙겨 숙소로 보내주었다. 몇 해 뒤 재만 형이 간암으로 별세했단 소식을 듣고 내려가 밤샘 문상을 했지만 아무도 물회를 먹자는 이는 없었다. 어부들과 함께 먹던 단순 소박한 그런 물회 한 그릇을 마시고 싶다.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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