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광장] 만남과 사건의 일지

입력 2012-12-18 11:07:43

만남과 사건의 일지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항상 특별한 만남이다. 만남은 하나의 사건이고 이는 항상 자신의 삶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연말이 되면 이러한 사건들을 되짚어보거나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며 정리와 숙고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것은 반복되는 일이지만, 의미 있는 반복이자 습관이 아닐까 한다.

만남의 여러 형식 중에 작가의 작업실에 찾아가는 일은 항상 미지에 대한 긴장과 약간의 설렘을 준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습관적인 일상의 행태를 벗어날지 모른다는 번거로움에 대해 내면적인 주저와 부담 또한 뒤따른다. 이러한 감정의 요동 속에서 올해도 여러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한 것 같다. 겨우 이름 정도를 들어보고, 이런저런 검색과 기억 속의 장면을 통해 작풍을 더듬어 보고 작업실을 방문하지만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야사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는 항상 자극적이다. 어떤 경우는 첫 만남의 기대에서 새겨질 무늬가 무엇일지 하는 점을 극대화하려고 일부러 사전 정보 없이 부딪히기도 한다.

이 중에서 최근에 만났던 어느 노작가의 만남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만나게 된 어느 젊은 학자가 생각난다. 이 노작가의 첫인상은 아주 오래된 나무와 같은 풍취를 풍겼다. 어딘가 무뚝뚝하면서 무심하지만 예민하면서도 묵직한 존재감이 전해졌다. 개념처럼 명료하진 않지만 내게 남긴 그의 풍취와 자전적인 에세이는 그 작가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인 '내가 만난 풍경, 내가 그린 세상'은 성장소설처럼 담담하고 소박하면서도 진솔하게 화가로 성장해가는 자신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에세이에는 화가가 화폭에 담게 될 결정적인 삶의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자신의 화폭을 조직하게 될 본질적인 매너가 담겨 있었다.

처음 작업실을 들어설 때, 눈에 들어오는 강렬한 색감과 바다풍경들은 그 공간을 색의 아로마로 넘치게 하는 듯했다. 작업실 풍경의 붙박이처럼 그 일부를 이루는 작가의 모습은 두터운 굳은살이 박였지만 그런 만큼이나 예민할 것 같은 뭔가 이질적인 감정이 들었다. 나는 바다풍경을 빠르게 훑어보며, '바다풍경이 왠지 선생님을 닮았다'고 이야기했다. 노작가는 약간의 미소로 응대할 뿐 특별한 말씀은 없었으나, 그의 에세이를 읽은 다음에야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다는 작가의 삶에 특별한 만남과 만남의 무늬를 남긴 사건이었고 그의 작업은 그 사건을 끊임없이 해석하고 기념하는 것이며, 해석 속에 자기 삶의 소망과 사랑과 고통을 고백하고 또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삶에 대한 그의 존경이 묻어 있다.

저녁을 함께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말하는 중간 중간 한 번씩 웃는 모습은 천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천진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외투 주머니에서 슬쩍 꺼내주는 그림엽서는 삶의 위트 그 자체였다. 요즘은 어딜 가나 명함을 주고받기에 바쁜데…. 돌아오는 도중에 작가가 건네준 그림엽서를 만지작거리면서 웃음과 감동이 두고두고 따라왔다. 그 엽서에 묻어 있는 그림 흔적은 한 존재의 고요하고 소박한 희망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찌 보면 이것이 삶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바다풍경과 노작가의 모습 못지않게,

미학을 공부하며 개념과 싸우는 젊은 학자의 내면 풍경 역시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일상적인 단어 속에 특별한 사건의 기록을 담거나 드러나게 하려는 노력은 수많은 사람의 저항에 부딪혀야 하고 때로는 모진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 개념에 담아낼 수 있는 것과 담아낼 수 없는 것을 고민하는 그 학자의 단어(개념)에는 어떤 만남과 사건의 풍경을 새기려는 노력이 쌓여가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으면서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매체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이 두 분의 요란하지 않은 내면 풍경은 자기 삶의 특별한 만남과 사건의 일지를 그리는 것이며, 그것을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특별한 하나의 풍경으로 만들어 내려는 애착과 열정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향기를 남기는 것 같다. 연말 풍경이란 이런 자취, 일지 속에 펼쳐지는 어떤 풍경을 수정하거나 완성해가는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인숙/미학박사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