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행복편지] 후회보다는 반성으로

입력 2012-12-18 07:49:29

며칠 전 초등학생 딸아이가 학교에서 가져 온 국어 시험 답안 때문에 온 집안이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습니다. 시험 문제는 교과서에 나온 동시를 응용한 것으로 '( ) 아빠 닮았다. ( ) 엄마 닮았다'에서 아이의 생각대로 괄호 안을 메우는 것입니다. 아이가 쓴 답은 순서대로 '속눈썹이 긴 건'과 '머리가 큰 건'이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엄마와 네가 왜 머리가 크냐고 되물으며 이런 답을 본 선생님이 얼마나 웃었겠느냐며 펄쩍 뛰었습니다. 처음 치른 시험에서 이런 답안을 쓰느라 얼마나 고심했을까 싶기도 했지만 채점하신 선생님께 부끄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입니다. 흥분하는 저를 보며 아이는 얼굴이 빨개진 채 "그 말 말고 뭘 써야 할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가 세수를 시켜주시면서 "우리 ○○, 속눈썹 긴 건 아빠 닮아서 예쁜데 엄마 닮아서 머리가 커서 문제"라고 반복해서 얘기하셨던 게 기억에 남아서 그런 답을 쓴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부모님으로부터 그 말을 평생 듣고 살아오긴 했습니다. 결국 딸과 외손녀에게 그렇게 세뇌시키신 부모님을 원망해야 하겠지만, 당신들도 그저 생각을 반복해서 이야기하신 것뿐이니 뭐라 할 말도 없기는 합니다. 저는 아이에게 앞으로 이런 시험이 나오면 "손가락이 긴 건 엄마 닮았다"로 답하라고 얘기해줬습니다. 아이가 그 말을 얼마나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번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계기로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살아가는 것들에 관해 생각해봤습니다. 교육에 의해서 혹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습득된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특히 어릴 때 보고 배운 것은 평생 그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에는 어떤 대상에 대해 미리 습득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주말에는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동창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20년이라는 세월의 공백이 있었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난 후 서로의 첫 마디가 "똑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우리는 모두 20년 전과 '똑같은' 모습을 확인하고 감탄했습니다. 어디 외모만 그랬겠습니까.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같다는 사실에 이번 만남이 더 반가웠습니다.

한 친구는 동창회에 간다고 남편한테 이야기하니 '돈 자랑, 남편 자랑, 자식 자랑' 위주가 된다는 동창회에 왜 나가느냐며 말리더라고 얘기했습니다. 드라마에서도 흔히 접하는 동창회 후기는 좋은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신문광고를 보다가 '동창회 대비 성형수술'이라는 문구를 보고 웃은 적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동창회라는 것이 괜한 자격지심에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만남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동창회에 관한 편견 중 하나입니다.

저의 동창회에서 친구들은 추억을 나누고 서로의 근황을 전해들으며 하하 호호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연히 서로의 옷차림, 가방 등을 의식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앞으로 세월이 더 흘러서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달라진 후에는 서로 어떤 모습을 보고, 보이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첫 모임에서처럼 서로의 변한 모습을 확인하고 건강을 걱정해주는 만남이 되기를 바라며 자리를 마감했습니다.

'아침편지'로 유명한 고도원 씨는 저서 '꿈이 그대를 춤추게 하라'에서 '나이가 들수록 아이의 귀를 닮아야 한다. 잘 귀담아듣는 사람, 그래서 잘 반성하고 잘 감동하고 잘 사랑하며 순진하게 사는 사람, 언제나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나이 들수록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귀와 마음을 열어둬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봅니다.

어느덧 12월도 중순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헐…'이라는 감탄사가 요즘 같은 때야말로 저절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지내다 보니 벌써 연말입니다. 문무학 대구예총 회장은 어느 프로그램 서문에서 '12'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올림포스 12신, 곤륜산의 12선인, 컴퓨터 기능키도 F12로 끝맺음은 12가 완전한 주기 우주의 질서인 까닭, 3×4=12에서 3은 신, 4는 인간, 12는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조화를 의미한다.'

신과 인간,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이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우주의 한 주기가 또 이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음에는 후회도 있고 반성도 있습니다. 후회하는 사람은 타인을 탓하거나 억울한 마음이 강하고, 반성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양심과 대의를 돌아보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후회는 과거 지향적이지만 반성은 희망적인 미래를 설계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후회보다는 반성으로 한 해를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지난 1년 동안 독자 여러분과 소통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언미/대구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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