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엄마 잃고 '왕따'의 경험…양반 아닌 '약자' 서민문화에 운
점점 빨라지는 사회변화 때문일까. 세월의 속도가 참 빠르다. 그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아련한 추억과 함께 점점 사라져 가는 것들이 많다. 그중에는 사라져선 안 되는 것들도 있고 다시 생명력을 얻는 것도 있다. 임재해(60)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는 우리 전통과 문화가 녹아있는 민속문화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칼바람이 부는 11일 오후 임 교수를 만나기 위해 안동대학교를 찾았다.
◆민속문화 지킴이.
약속시간을 20분이나 지났지만 임 교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화도 없고 전화도 되지 않는 '통신 두절'. 무작정 교수실을 찾았다. 그런데 잘 정돈된 책상과 가지런한 책들이 자리하는 여는 연구실 풍경과 사뭇 다르다. 천장까지 수북이 쌓인 책들이 '책 동굴'을 이루고 있고 어지럽게 널린 자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신 대형 컴퓨터 화면과 연결된 키다리 책상이 비좁은 책 동굴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곳에서 서서 연구하고 있는 임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연구에 전념하다 보니 약속시간을 깜빡 했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임 교수는 "서서 연구를 하다 보면 항상 깨어 있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예순의 나이에도 날씬하고 맵시가 있다.
그에게는 '민속문화지킴이'라는 애칭이 항상 따라다닌다. 개인 홈페이지에서도 그는 민속문화지킴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민속학이란 한 우물을 파고 있다. 한국의 민속문화를 연구하고 방대한 자료를 축적하고 그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의 민속문화를 후대에 전하려 노력하고 있다. 문화재보다 살아있는 문화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 그리고 유형 문화보다는 무형 문화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민속문화지킴이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지만 그 문화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다. 생활 속에서 잊히고 있는 문화를 찾아내 기록하는 것은 유형문화의 산물인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보다 더욱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들이는 것은 물론 전국 곳곳으로 발품을 팔아야 한다. 무형문화를 몸으로 체득하고 있던 사람이 전수자 없이 세상을 버리면 그마저도 어렵다. 그래서 문화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방법이나 방향이 유형문화재에서 무형문화재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는 공기와 같아 일상생활 속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유형문화재는 확대재생산이나 수출이 불가능하지만 무형문화재는 바이러스처럼 무한복제가 가능하지요."
◆슬픈 왕따에서 계단을 오르는 거북이로
어렸을 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모든 일을 잘했던 사람이 아니다. 어렵게 한 계단씩 올라가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계단을 오르는 거북이'였다.
"네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서모(庶母) 밑에서 자라 옷치레를 남들처럼 제대로 해준다거나 소풍을 갈 때 도시락을 싸주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디에 잘 끼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초교 시절 몸이 몹시 약했었죠, 키도 작고 친구들에게 늘 얻어맞고 다니는 '왕따'였지요."
중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에 가면 무엇인가 새로운 생활이 펼쳐질 것이란 희망이 있었지만 집안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불량 선배들이 자취방에 와서 괴롭히기도 하고 함께 자기도 했지만 휩쓸린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상황이 어려울수록 벗어나려는 노력을 했고 언제든지 좋은 일을 많이 하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가서 키가 커지면서 불량학생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임 교수는 어릴 때의 '약자의 경험'은 그를 민속학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민속학 자체가 양반의 문화가 아닌 당시 사회적 약자인 서민 중심의 문화이지요. 왕따 경험 때문인지 사회적 약자이지만 선한 사람들의 문화에 당연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지키고 싶었어요."
이런 생각에 5년 동안의 교편생활을 접고 영남대 국문학과에 진학해 민속학 공부를 시작했다.
◆할머니가 사라지면 박물관이 사라진다
그는 요즘도 틈만 나면 주민들의 숨결과 땀이 묻어나는 마을 곳곳을 돌며 민속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그 지역의 문화를 오롯이 품고 있는 마을을 조사할 때 우리네 생활문화를 보존'복원'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어떻게 이 땅에 정착했고 살아왔는지, 땅과 주민들은 어떻게 하나가 되어 갔는지에 대해서 연구하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무형문화, 즉 생활문화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살아 숨쉬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형문화는 사람 중심이다 보니 옛것을 가진 사람이 죽거나 없어지면 그 문화도 따라 없어집니다. 지금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런 무형문화를 품고 있는 공간 혹은 바탕이지만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무형문화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어집니다." 그래서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시면 박물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고 할아버지 한 분이 안 계시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단다. "언젠가는 사라지고, 잊힐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조급증이 생깁니다."
그의 열정에 안동대 민속학과 학생들도 동참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결실이 '한국민속과 전통의 세계' '한국민속학과 현실인식' '지역민속연구와 국학' '신라금관 기원을 밝힌다' 등 30여 권의 책이다.
임 교수는 마을조사가 삼국유사와 같은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생활문화를 통해 문화사적인 가치가 있는 문화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문화라고 설명했다.
◆문화 주권운동 앞장
그가 마을조사를 하면서 이론적으로 구성한 것이 문화주권론이다. '문화는 남이 대신해줄 수 없다'는 것이 요지다. "정치'경제적으로 서울의 권리를 지방에 나눠달라는 지방분권 운동이 한창입니다. 이는 바람직한 일이지만 마치 원래 중앙(서울)의 것을 (나눠 달라고) 구걸하는 모양새입니다. 문화주권은 타고난 권리가 모든 지역에 다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분권보다 주권운동이 더 필요하단다.
"정치권력만 천부적 주권이라고 생각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문화주권입니다. 사실상 정치권력은 투표해서 정치가에게 권력을 위임하면 투표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행사합니다. 경기에 나가는 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문화는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우리 전통의 혼이 담긴 (말)춤을 췄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의 K팝은 진정한 한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죠. 미국의 노래와 춤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고 그래서 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지요." 진짜 한류는 자신의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어 전파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문화주권은 지역을 위한 주권이기도 하다. 생산하는 주체가 소수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이를 강제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예전에 마을 공동체에서 모든 이들이 문화 생산자로 활약했듯 우리 모두가 문화주체로서 문화주권을 가지고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고유의 문학, 예술 등 모든 갈래가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천부적인 문화능력을 알게 모르게 문화생산전문가와 그것을 유통하는 상업적 자본에 다 빼앗겼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민주화, 혹은 문화자치가 더 중요합니다." 임 교수는 '미래는 지역문화의 시대'라고 단언했다. "막걸리와 먹는 샘물, 김치 등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그 전조에 해당합니다. 지역의 문화와 지역의 것들이 점차 중요해지는 이유지요."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임재해는= 1952년 안동에서 태어나 금산초교와 안동중학교를 나왔다. 대구 대건고를 거쳐 안동교육대를 졸업한 뒤 교사생활을 했다. 이후 영남대 국문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에서 민속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한국민속과 전통의 세계' '한국민속학과 현실인식' '지역민속연구와 국학' '신라금관 기원을 밝힌다' 등 30여 권의 책을 냈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민국학술원으로부터 9권의 저서가 학술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 10월 제26회 금복문화상(학술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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