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신카나리아의 특별한 삶(하)

입력 2012-12-13 14:08:46

음반 대중인기 휩쓸어…대부분 식민지의 슬픈 삶 노래

가수 신카나리아는 19세 이후에 여러 편의 가요작품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 제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숨고개''사랑아 곡절업서라''무궁화 강산''웅대한 이상' 등이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서 '무궁화 강산'(전수린 작사'작곡)이란 노래는 광복 이후 '삼천리강산, 에헤라 좋구나'로 제목이 바뀌었고, 신카나리아가 무대 위에서 항시 즐겨 부르던 자신의 애창곡이었습니다. 일제강점 체제에서 '봄''무궁화''삼천리강산' 등속의 단어들이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禁忌語)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 노래의 의미는 새롭게 부각된다 할 것입니다.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아라

아까운 이내 청춘 다 늙어 가누나

강산에 새봄은 다시 돌아오고

이 가슴에 새봄은 언제나 오나요

세월은 한 해 두 해 흘러만 가구요

우리 인생 한 해 두 해 늙어만 가누나

(후렴)삼천리 강산에 새봄이 와요

무궁화 강산 절계 좋다 에라 좋구나

신카나리아가 주로 음반을 발표했던 레코드회사는 시에론레코드였습니다. 신카나리아에게 노랫말을 주었던 작사가는 천우학, 김희규, 전임천, 임창인, 유일, 임서방, 유도순, 노자영 등입니다. 이 가운데 유도순과 노자영(노춘성)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문단에서 활동하던 낭만주의 계열의 현역 시인들입니다. 임서방은 줄곧 신카나리아의 매니저 겸 후견인으로 도움을 주던 끝에 결국 부부가 되었습니다. 신카나리아 노래의 작곡을 담당하던 대중음악인은 유일, 전수린, 안영애, 이재호 등입니다.

시에론레코드에서 활동하던 시절, 신카나리아는 신은봉과 더불어 시에론 최고의 음반판매 수를 자랑하는 대표적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12인치 음반 한 장의 가격이 1원이었음에도 신카나리아의 음반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대중들의 인기를 집중시킨 음반을 당시 용어로는 '절가반'(絶佳盤)이라 불렀습니다. 이 용어는 실제로 음반 상표에 표시되기도 했는데, 신카나리아의 음반에는 이 '절가반'이 여러 장이나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를 업고 신카나리아는 요즘의 만담과 비슷한 스케취, 혹은 난센스 종류의 음반도 가끔 취입하다가 1934년 리갈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겼습니다.

1938년 이후 신카나리아는 음반 발표보다 악극단 공연에 더욱 열정을 쏟았습니다. 빅타레코드사의 악극단, 중국 천진의 악극단, 신태양악극단, 포리도루실연단 등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김해송이 주도하던 KPK악극단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후견인이었던 임서방과 이별하고, 이익(예명 김화랑)과 재혼했습니다. 새로 맺어진 신카나리아 부부는 새별악극단을 창립하여 전국을 순회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신카나리아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 장병위문단의 멤버로 군부대 위문공연에 열중했습니다. 신카나리아가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바로 이 시절의 모습입니다.

1972년 회갑을 넘긴 신카나리아는 서울 충무로에서 '카나리아다방'을 열고 옛 동료가수들과 어울려 추억담을 즐겨 나누며 소일하게 됩니다. 한국가요사에서 처음으로 예명을 썼다는 가수! 소녀 같은 단발머리에 한복차림이던 신카나리아! 그 특유의 간드러진 음색으로 90세까지 기꺼이 무대에 오르던 직업적 천품(天稟)의 가수는 마침내 하늘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가 남긴 노래들은 대부분 식민지라는 감옥에 갇힌 백성의 슬픈 삶을 다룬 것이었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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