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배지 남해, 서글픈 文香 솔솔

입력 2012-12-08 07:29:30

바람과 이슬로 몸과 마음을 씻고/ 박진욱 지음/알마 펴냄

먼 한양에서부터 쉬지 않고 걸어와 지난밤 노량에 도착했던 류의양은 영조 47년(1771년) 2월 26일 날이 밝자마자 노량 나루터로 나와 배를 기다렸다. 섬은 지척이었다. 바다라고 했지만 남해섬까지 물의 너비는 한강의 3,4배쯤 되는 듯 보였다. 바닷물을 건너기는 처음이었지만 물이 잔잔하고, 폭이 좁아 무섭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상 나룻배가 도착하고, 배에 오르기에 앞서 뒤를 돌아보니 북쪽은 운산이 첩첩하고, 가국(家國)이 천 리 밖이라, 마음이 울적했다. 이제 이 배를 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를, 살아서 돌아올 수 있기는 할까 모를 유배의 섬, 남해였다.

조선시대에 수많은 정치가들이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지가 임금과 조정이 있는 한양에서 멀수록 형이 엄중했다. 죄질과 당파적 정략에 따라 그 거리가 결정되었다. 멀리 함경도로 유배를 떠나는 사람, 전라도 강진으로 떠나는 사람, 경상도 남해로 가는 사람, 강원도로 가야 할 사람도 있었다. 관헌이 지정하는 집에서 잠을 잘 때 외에는 쉬지도 못하고 여름 뙤약볕과 겨울 칼바람 속에 그들은 걷고 또 걸어 임금이 정한 땅으로 가야 했다. 도착하는 지방마다 그 지역 관리들이 나와 그들을 감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똑같이 유배지에 도착했으되 어떤 이는 임금의 부름을 받아 주류사회로 복귀했고, 어떤 이는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유배형을 받은 사람들은 주류사회에서 밀려남과 동시에 치열한 경쟁에서도 한 발짝 물러섰다. 물러난 뒤에야 그들은 멈춤과 돌아감, 물러남을 배웠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로 세상에 남았다.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500여 권의 책을 썼고, 정철, 송시열, 김춘택, 이진유는 유배지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시와 가사 혹은 연구논문의 형태로 남겼다. 류의양은 절해고도 남해 곳곳을 답사하며 느낀 것들을 '남해문견록'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남해에서 13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자암 김구는 수십 수의 한시를 남겼다. 그중 남해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경기체가 '화전별곡'은 지금도 잘 알려져 있다. 남해 노도에서 3년 동안 귀양생활을 했던 서포 김만중은 '사씨남정기' '구운몽' '서포만필'을 썼다.

남해는 동쪽으로 거제가 보이고, 북쪽으로 삼천포, 서쪽으로 여수로 가는 길목에 있다. 뒤에 높은 산이 있고, 앞은 야산이 둥글게 막고 있어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천연 항구이기도 했다. 미조항은 조선 최대의 해군기지이자 왜구가 지나가는 길목이어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원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 장군이 '내가 직접 바닷가로 가서 보고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고하고 섰던 노량 나루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은이 박진욱은 우연히 조선시대 남해에서 유배 생활했던 류의양이 쓴 '남해문견록'을 접하고, 이 책에 기록된 유배의 흔적을 따라 남해를 답사했다. 유배객들이 살았던 집과 머물렀던 공간을 돌아보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비사와 그 배경을 소개한다. 김만중이 귀양살이할 때 '주자어류' 전질을 빌려다 읽었다는 남해향교, 고려 말의 성리학자 백이정을 추모하는 사당 난곡사, 서포 김만중이 귀양살이를 했던 노도,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벽작개의 암각화, 양아리 고대문자 암각화, 조선시대 남해에서 가장 큰 해군기지로 미륵이 돕는다는 뜻을 가진 미조항, 최영 장군의 넋을 위로한 무민사 등 유배와 관련한 남해의 다양한 이야기를 추적하고 있다. 지은이는 또 유배지는 아니나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장소로 알려진 관음포를 찾아가 이순신의 행적을 좇고, 충무공 사당 충렬사도 찾아간다.

424쪽, 1만9천5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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