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토크] 노래를 찾는 사람들(하)

입력 2012-12-06 14:23:39

노래가 세상 변화 밑거름…두 번째 앨범 민주화 정점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하 노찾사)의 시작에는 김민기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뮤지컬 제작을 고민 중이던 김민기는 기존의 민중가요를 음반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대학가 노래패를 모은다. 서울대 '메아리', 고려대 '노래얼', 이화여대 '한소리'가 중심이 된 음반 작업은 1984년 어렵게 사전검열을 통과한 9곡의 민중가요를 녹음하게 된다.

사실 '노찾사'라는 이름은 음반의 타이틀이었다. 김민기와 연우무대에서 함께 활동하던 연출가 이상우가 이름을 붙인 앨범은 노래가 세상 변화의 밑거름이 되자는 생각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체계화되고 변혁적이 된 노래운동이 일반 대중들에게 다가서는 모습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찾사의 1집 앨범은 합법적인 녹음에도 여전히 군사정권의 눈치를 봐야 했던 음반사들의 발매 주저로 1987년 5월에야 어렵게 발매가 이루어진다.

노찾사가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된 것은 1987년 6월 항쟁이 계기가 되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였지만 대중음악계에 찾아온 자유의 바람은 민주화를 체감하는 상징이었다. 1987년 8월 18일 공연윤리위원회가 가요와 팝 186곡을 해금한 것이 우선했고 같은 해 10월 13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노찾사의 첫 번째 공연은 민중이 스스로 쟁취해 낸 민주화의 모습 자체였다.

공연장에 모인 관객들은 모든 노래를 함께 부르며 눈물 흘리는 감동을 연출했고 1989년 공개된 노찾사의 두 번째 앨범은 100만 장의 매출액을 올리며 노래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정점이 되기도 했다.

수많은 노래운동 집단 가운데 유독 노찾사가 대중들에게 각인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음악에 대한 고민에 몰두했다는 점이다. 그저 아마추어리즘과 노래운동의 기능에만 몰두했던 여타 노래집단에 비해 노찾사는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노래집단을 지향했고 노래가 가지는 예술적 가치에 대해 고민했다.

이들의 첫 번째 앨범이 김민기의 손을 거쳤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두 번째 앨범이 나동민(강인원·전인권·이주원과 함께 포크그룹 '따로 또 같이'에서 활동했던)의 지휘 하에 만들어졌다는 점은 음악적 고민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언더그라운드 음악과의 관계는 따로 언급해야 할 정도로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대중음악의 다양성과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노찾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노래집단이지만 대중들에게 그 기억은 파편으로 희미하기만 하다.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 등의 이름에 노찾사 출신이라는 수식이 붙을 뿐 노찾사와 함께 노래하고 눈물 흘렸던 이들의 기억은 이제 흐릿해졌다.

노찾사가 대중들에게서 잊힌 때는 한국대중음악이 자본과 힘의 논리에 매몰된 후 다양성을 상실하고 대중들의 정서마저 천박해진 시기이다. 노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노래를 통해 실천하고자 했던 노찾사라는 이름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되어서는 곤란한 이유기도 하다.

권오성(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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