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44) 사통팔달 교통요지 김천 ①역사 속으로 사라진 역마

입력 2012-11-02 07:43:08

부산∼서울 잇는 내륙 교통요지…신라때부터 驛院 번창

황악산자락 김천이 사통팔달 교통 도시로 이름난 배경에는 김천(도)역이 있다. 역마길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봉산면 고도암 마을 앞에는 역마길 일부가 남아 있어 운치를 더한다.
황악산자락 김천이 사통팔달 교통 도시로 이름난 배경에는 김천(도)역이 있다. 역마길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봉산면 고도암 마을 앞에는 역마길 일부가 남아 있어 운치를 더한다.
옛 김천역 자리인 김천초교 교정에 나란히 서 있는 찰방선정비
옛 김천역 자리인 김천초교 교정에 나란히 서 있는 찰방선정비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지난 가을날 오후 김천시 남산동 김천초등학교 교정. 입구에 들면 왼쪽으로 작은 비석 4개가 나란히 서있다. 이 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비와 이순신 장군 동상 사이에 있어 찾지 않아도 한눈에 들어온다. 주변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와 울긋불긋한 느티나무가 있어 주민들도 자주 찾는다. 그러나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세월의 흔적으로 많이 훼손돼 알아보기 쉽지않다. 김천역의 수장이었던 찰방(察訪'오늘날 역장)의 선정비지만 아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옛부터 교통의 요지로 손꼽혀 왔던 김천은 유난히 역이 많았다. 김천초교는 20여 개의 역을 관할했던 김천도역(金泉道驛)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역마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흔적은 수백 년의 세월을 넘어 김천의 교통 역사를 전하고 있다.

◆영남 내륙의 중심도시 김천, 그 중심에 역(驛)있어

황악산 자락에 자리한 김천은 한마디로 '사통팔달'의 교통도시다. 김천이 교통의 요지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시대 황악산 자락의 최초 소왕국인 감문국이 개령'감문면 중심으로 터를 잡았다. 주변의 성주(星州)에는 성산가야, 상주(尙州) 사벌국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감문국은 신라의 전신 사로국에 의해 231년 멸망한다. 사로국이 감문국을 침입한 배경에는 추풍령을 비롯한 김천 지방의 교통로 확보가 목적이었다는 것이 사학자들의 분석이다. 신라는 감문국을 멸하고 이곳에 주(州)를 설치했고, 추풍령을 넘어 금강유역으로 진출해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신라는 소지왕 9년(487년) 주요 교통로에 역을 설치했다.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유사들에게 도로를 수리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때 김천에 역이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역의 규모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개령면 일대가 김천의 중심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개령면 어디에 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천은 조선이 개국과 함께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통망을 구축하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조선시대 김천은 영남대로(嶺南大路)의 4로 중 우(右)로에 속한다. 부산에서 김해, 현풍, 성주, 김천, 추풍령, 영동, 청주, 죽산, 양재를 거쳐 한양으로 연결되는 우로는 걸어가면 16일이 걸렸다고 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부산에서 대구~문경새재~충주~용인을 지나 서울로 이어지는 길은 영남대로, 영천과 안동을 지나 죽령을 넘어 서울로 가는 영남좌(左)로로 표시했다. 오늘날 지도에는 경상도 서부지역인 김천'성주를 지나는 길의 이름을 우로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왕이 있는 한양에서 보면 이들 지역이 경상도 오른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일찍부터 김천은 상주와 성주, 선산의 중간이면서 영동을 비롯한 충청도와 무주 일원의 전라도, 거창을 통한 경상도 남쪽으로의 접경에 위치해 군사적'경제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추풍령은 소백산맥으로 가로막힌 영남지방과 타 지방을 연결하는 소통로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각광받았다.

◆김천역사의 또 다른 축 김천역

근래까지 존재했던 역(驛)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군사정보, 사신 왕래에 따른 접대와 마필 공급 등을 위해 설치됐다. 교통 통신기관으로 행정'외교'군사적으로 중앙집권 국가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왕의 지방 순행이나 행정 명령의 전달, 외국 및 지방 사신들의 왕래에 따른 숙식 제공을 위한 방편으로도 활용됐다.

신라시대에 설치된 역은 고려에 와서 설치와 운영을 담당하는 '역참제도'(驛站制度)가 도입되며 자리를 잡았다. 특히 지방 행정구역을 확립하고 호족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포석으로 더욱 정비되기 시작했다. 규모에 따라 역전(驛田)을 지급하고 역의 조직과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전국을 22역도(驛道) 체제로 편성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역의 기능이 더욱 강화된다. 병조(兵曹)-승여사(乘輿司)-역승(驛丞)-찰방(察訪)-속역(屬驛)으로 이어지는 역의 관리감독체제를 완비하고 30리(12.9km)마다 역을 설치했다. 전국에 종6품이 관리하는 44개의 역도(驛道)를 두고 538개의 속역(屬驛)체제로 정비했다. 이후 역의 기능은 더욱 다양해진다. 공물의 운송과 내왕인의 규찰, 죄인의 체포와 압송, 파발과 봉수대의 관리 기능까지 수행했다. 국경을 중심으로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첩보 수집과 군수품 조달 등 유사 시 국방의 일익까지도 담당했다. 1895년 근대적인 전화통신시설이 설치되기 전까지는 국가 통치 체제의 근간을 형성하는 기간(基幹)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을 중심으로 역촌(驛村) 형태의 마을이 형성되고 문물의 집산이 활발해져 시장이 개설되고 상품 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켜 지방 도시가 발달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김천 지명을 근거로 한 역(驛)이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사병지역참조'(高麗史兵志驛站條)가 처음이다. 경산부도(京山府道'오늘의 성주군)에 속한 25개의 속역(屬驛)으로 김산현의 김천역, 지례현의 작내역, 어모현의 추풍역, 개령현의 부상역, 지례현의 장곡역 등 5개 역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들어 세종 때 44역도, 538속역 체제로 개편되면서 김천도(金泉道)가 신설된다. 김천(도)역은 17개 속역을 관할에 뒀다. 이때부터 김천역 시대가 열린다. 김천(도)역은 본역인 김천역을 비롯해 추풍역'문산역'부상역'양천역'작내역'장곡역 등 김천지역의 7개 역과 성주의 답계역(踏溪驛)'안언역(安偃驛)'무계역(茂溪驛)'팔거신역(八居新驛), 고령 안림역(安林驛), 대구 범어역(凡於驛), 하빈신역(河濱新驛), 인동의 인동신역(仁同新驛), 약목신역(若木新驛) 등 17개 속역을 거느린 대규모 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어 세조 때 합천의 금양역(金陽驛)과 초계의 팔진역(八眞驛), 함양의 근빈역(勤賓驛), 거창의 성기역(星奇驛)'성초역(省草驛), 대구 금천역(琴川驛)까지 포함해 21개 역으로 관할 구역이 확대됐다. 조선 말까지 중심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며 김천이 전국적인 교통 중심지로 부상하는데 기반이 됐다. 역이 오늘날 김천이 사통팔달의 교통'상업중심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교통 발달은 외침'전쟁 때 더 큰 피해도 남겨

그러나 편리한 교통의 이면에는 아픔도 적지않게 간직하고 있다. 백제'신라'가야의 접경에 위치한 탓에 삼국시대에는 김천을 배경으로 끝없는 전쟁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감문국은 주변 가야 소국보다 일찍 신라에 병합된다. 또 임진왜란 때는 서울로 향하는 경상우도의 역로에 위치한데다 전략적 요충지인 추풍령을 끼고 있어 주요 전쟁터가 됐다. 북진하는 왜병의 본거지가 설치돼 왜병 3만 명이 이곳에 주둔했다. 이 바람에 수많은 백성이 군영에 갇혀 노역에 시달리거나 도륙을 당하고 말았다. 추풍령과 우두령 등은 김천과 인근 지역으로 연결되는 주요 길목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정기룡 장군의 추풍령 전투와 김면 의병장의 우두령 전투는 임란 의승병항쟁사에 남은 대표적인 전투로 이름이 높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는 직지사를 비롯해 주변 목조 문화재가 전부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다. 직지사의 경우 의병장 사명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인연으로 인해 왜병들이 더욱 철저히 파괴했다. 직지사는 당시 일주문'천왕문'천불전을 제외한 40여 개 전각'목탑 등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때 사찰에 있던 대부분의 유물들도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또한 18세기 초 일어난 이인좌의 난(무신란) 때는 우두령을 정점으로 김천역을 차지하기 위한 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도 낙동강 전선을 지휘하는 북한군의 임시사령부가 김천에 설치되면서 유엔군의 융단 폭격이 가해져 전 시가지의 80%가 파괴되는 참화를 겪었다. 동전의 양면처럼 김천의 가진 교통 상의 장점은 더 큰 피해를 가져오는 이중적인 측면을 간직하고 있던 셈이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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