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였다 뗐다…유연함으로 힘 받는 '나만의 공간 미학'

입력 2012-10-27 09:51:11

자유 발랄 메시지 창출 별별 스티커의 세계

스티커는 유연하다. 어디든 쉽게 붙일 수 있고, 떼기도 비교적 수월하다. 찍거나 새기기 번거롭고, 한 번 각인하면 되돌릴 수 없는 도장이나 '서각'(書刻) 등과 다르다. 세상만사 유연함 속에 자유로운 발랄함이 생동하는 법. 유연함을 무기로 스티커는 세상 곳곳에 퍼져 별별 '표식'을 남기고 있다.

◆초보운전 스티커 개성시대

초보운전 스티커 부착은 1970년대 서울에서만 권장하던 것을 전국으로 확대한 것이 시초다. 당시 경제성장의 여파로 신규 운전면허 소지자가 급증했고, 덩달아 경력 1년 미만의 초보운전자들이 일으키는 교통사고도 크게 늘어났기 때문. 1995년 10월부터는 초보운전자들이 필수로 '초보운전' 스티커를 부착하는 법이 마련됐다. 당시 경찰은 면허 취득 1년 미만의 운전자가 차에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이지 않고 운전하다 적발될 경우 2만원의 범칙금을 부과했다. 스티커는 정해진 규격도 있었다. 가로 30㎝, 세로 10㎝ 크기에 바탕은 노란색, 테두리는 녹색, 글자는 청색이어야 했다. 경찰서나 운전면허학원 등에서 배부 받지 못한 경우 스티커를 직접 그려 붙이는 수고로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 2000년대 초에 스티커 부착 강제 조항은 사라졌다. 하지만 초보운전자들은 도로에서 양보와 배려를 구할 '설득의 표식'이 여전히 절실했다. 이때부터 재치만점의 다양한 설득 문구가 차의 뒤태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이달 23일 대구의 길거리와 주차장으로 나가 차에 부착된 '초보운전' 스티커를 살펴봤다. 조사한 100여 개 스티커 중 가장 많은 40%가량을 차지한 문구가 '아기(아이)가 타고 있어요'(혹은 'Baby In Car')였다. 이에 대해 초보운전자들은 "누구나의 감정에 호소할 수 있는 가장 설득력 높은 문구"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직장인 장현진(29'대구 중구 대봉동) 씨는 "초보운전자 시절 미혼임에도 '아기가 타고 있어요' 스티커를 차 뒤에 붙이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 다음으로 '초보운전'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문구가 많았고, 나머지는 요즘 유행하는 '코믹' 초보운전 문구들이었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를 조금 변용한 '까칠한 아기가 타고 있어요', 가장 흔한 교통사고인 접촉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건들면 물어요', "집에 가서 밥이나 하라"는 남성 운전자들에게 "밥하고 나왔어요"라고 대답하는 여성 초보운전자용 스티커 등이 있었다. 대중 문화 속 재미난 문구들도 곧바로 초보운전 스티커로 패러디 된다.

자칫 거부 반응이 염려되는 협박조의 초보운전 스티커 문구에 대해 직장인 이효연(33'여) 씨는 "'봐주세요'식 저자세의 문구가 적힌 초보운전 스티커를 달면 다른 차들이 오히려 무시하며 위협한다. 물론 협박조의 문구가 크게 통할 리 없겠지만 당당하게 운전하고 싶어 붙였다"고 말했다.

이 같은 재치만점 문구의 초보운전 스티커들은 사실 '수제'가 원본이다. 네티즌들이 촬영해 인터넷 유머게시판 등에 올린 엽기 혹은 이색 초보운전 문구들 중 인기있는 것이 제품으로 제작돼 출시되고 있는 것. 인터넷 쇼핑몰에서 초보운전 스티커를 판매하고 있는 한 업체 관계자는 "최근 신규 운전면허 소지자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여성 운전자도 늘어나는 등 인터넷에서나 쓸 법한 발랄한 문구가 적힌 초보운전 스티커를 찾는 수요가 늘었다. 그래서 캐릭터 스티커 제품도 생산하고 있다"며 "초보를 탈출한 운전자들도 재미로 스티커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생활 속 실용 스티커

집 안에서도 스티커는 인테리어를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역시 저렴한 비용과 손쉬운 부착이 장점이다. 벽지 리폼 스티커가 대표적이다. 오래된 벽지의 경우 새로 도배를 하기 힘들거나 부분 오염의 경우 스티커를 부착해 인테리어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 특히 아이들의 방을 꾸며줄 경우 꽃, 곤충, 동물 등 문양은 물론 숫자, 영어 알파벳, 세계지도 등의 스티커를 부착할 수 있다.

오래된 가전제품에도 시트지라 불리는 스티커를 붙이는 '가전 리폼'이 최근 유행하고 있다. 주부 조모(40) 씨는 구입한 지 10년이 넘어 누렇게 색이 바랜 흰색 에어컨디셔너와 냉장고를 최근 리폼했다. 최신 가전제품에 새겨지는 고급스런 디자인의 문양을 본따 인쇄한 시트지를 사서 붙인 것. 조 씨는 "가전제품은 기능도 중요하지만 손님이 집을 방문할 경우 미관도 중요한 인테리어 제품이다. 저렴하게 가전제품을 새것처럼 꾸미니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미용에도 스티커 제품이 많이 쓰이고 있다. 네일(손톱 미용) 스티커의 경우 탈'부착이 쉽고, 기존 매니큐어로 구현하기 힘든 세밀한 문양도 표현 가능해 인기다. 문신 스티커는 자칫 피부에 손상을 가할 수 있는 문신 시술에 비해 접근이 쉽고, 역시 탈'부착이 간편해 인기를 얻고 있다.

◆기능성 스티커 인기

기능성 스티커도 인기를 얻고 있다. 얇은 종이에 첨단 기능성 요소를 탑재하는 기술이 속속 개발되면서 스티커는 단순한 표식을 넘어서고 있다.

스티커의 개념을 조금 확장해보면 기능성 스티커의 고전은 일명 '붙이는 의약품'들이다. 먼저 파스(pas)가 있다. 파스는 독일어 파스타(pasta, 붙이다)의 준말이다. 직포에 약물을 넣어 만든 피부외용 첩부제로 통증 완화 제품이 대부분이다. 이외에 귀 밑에 붙이는 멀미약, 금연 보조제 등 붙이는 '패치' 제품도 있다. 일반명사화 된 '대일밴드'는 국내 대표적인 붙이는 반창고 제품이다.

스티커 한 장으로 보안 유지 및 정보 유출을 막는 기업용 보안스티커도 있다. 찢어져야 내부 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간주하는 기존 '봉인' 종이를 업그레이드 한 것. 소형 칩을 스티커에 붙여 훼손 여부는 물론 추적도 가능한 방식의 제품을 기업에서 속속 도입하고 있다.

과일의 신선도를 지켜주는 '신선스티커'도 있다. 과일은 공기 중에 에틸렌 가스를 내뿜는데 이는 과일 조직의 노화를 촉진한다. 그래서 에틸렌 가스를 흡수하는 흡수제를 스티커로 만들어 꼭지에 붙이는 것이다.

◆즐거움도 담는 스티커

사실 오래 전부터 스티커는 아이들의 장난감이었다. 비싼 로봇이나 인형 장난감에 비해 로봇과 인형 그림이 그려진 스티커나 딱지는 문방구에서 푼돈을 주고 쉽게 살 수 있었다. 그러던 스티커가 이제는 그럴듯한 장난감 및 보조 교재로 출시되고 있다. 서점에 가면 '뽀로로' 등 인기 캐릭터가 그려진 '스티커 북'이 유아 서적 코너를 가득 채우고 있다. 구겨지거나 잘 찢어지지 않는 '펠트' 재질의 '헝겊 스티커'를 여러 번 떼었다 붙였다 하며 숫자와 글자를 익힐 수 있는 제품들이다.

아이들의 스티커 사랑은 1990년대 후반부터 판매되고 있는 일명 '스티커 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제품에는 빵과 함께 명함 절반 정도 크기의 스티커가 들어있다. 스티커에는 초기에 연예인 사진이나 캐리커처가 그려졌던 것이 요즘은 인기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져 나온다. 반짝이는 홀로그램 스티커나 흔하게 나오지 않는 일명 '희귀' 스티커가 아이들의 수집욕을 자극한다. 빵은 친구에게 주고 스티커만 빼내 수집하는 아이들도 있고, 스티커마다 값을 차등적으로 매겨 거래하는 인터넷 카페도 있을 정도다.

'스티커 사진'도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해 학생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 1천~2천원 정도를 넣고 배경 그림을 선택한 뒤 둘 혹은 여럿이 사진을 찍은 다음 인쇄한 스티커 사진을 우정이나 사랑의 증표로 나눠 가졌다. 지금은 사진에 넣는 배경 그림이나 촬영 효과가 더욱 풍부해졌다.

아기자기한 개성을 담는 '수제 스티커'도 인기다. 가정용 프린터가 보급되고, 주변에 디지털 사진 인쇄소가 늘면서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문구나 그림을 스티커용 '라벨지'에 인쇄해 사용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이름표도 그렇게 만든다. 흰 바탕에 테두리에는 빨간 줄이 그려진 '사무용 견출지'에 이름을 적어 문구류에 붙이는 것은 이제 '촌스러운' 일이 됐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