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합창계의 대부 윤학원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입력 2012-10-27 09:54:46

합창계의
합창계의 '미다스 손'으로 불리는 윤학원 감독. 국내 음악계에서는 윤 감독이 지휘하면 세계적인 합창단이 된다는 공식이 생겼다.

2009년 3월 7일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중심가에 있는 시빅센터 뮤직홀에 세계 각국에서 합창 지휘자 3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미국 합창지휘자연합회(ACDA)가 주최한 이 행사에는 전 세계에서 4곳의 합창단이 초청됐다. 베네수엘라, 영국, 캐나다의 합창단과 아시아권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의 인천시립합창단이 참가했다.

이윽고 한국초청팀의 순서. 첫 곡은 공간음악(공간에 있어서 음의 위치'방향성'운동성을 악곡의 중요한 요소로서 취급한 음악)으로 만든 '메나리'로 아리랑 음악을 재해석한 합창곡이었다. 윤학원(74)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은 합창단원들을 세 군대로 나누었다. 한 팀은 무대에, 또 다른 두 팀은 객석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배치했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윤 감독이 서서히 손짓을 시작하자 화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무대와 객석 양쪽에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 노래가 흘러나오자 객석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런 형태의 연주는 처음 경험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세 곳에서 나오던 소리가 무대 천장에서 한군데로 모이고 이는 다시 객석으로 퍼져 나갔다. 특이한 한국적 화음과 울림이었다. 객석에는 전율이 흘렀고 이곳저곳에서 감탄사가 들렸다. 첫 곡이 끝나자마자 3천 명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냈다. 한국형 공간음악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미국 ACDA 컨벤션 50년 사상 첫 곡부터 기립 박수가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형 공간음악 창조

최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한국대중음악의 가능성을 과시했다면 윤 감독은 한국 합창음악의 수준을 세계에 알리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이달 22일 대구를 방문한 윤 감독을 경북도청에서 만났다. 경북도에서 추진 중인 '독도가곡 공모전' 심사위원으로 선정돼 위촉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합창계의 대부'라는 화려한 수식과는 달리 철 지난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소탈한 모습이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조용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백발의 노신사, 웃음소리조차 한 편의 음악과도 같은 지휘자 윤학원 감독. 현재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겸 지휘자를 맡고 있는 그는 지난해 청춘합창단을 이끌며 한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유명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합창계를 이끌어오며 한국음악계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올해로 '합창지휘 인생 50년'을 맞은 백전노장이다. 선명회 어린이합창단, 서울레이디스 싱어즈, 인천시립합창단 등 그의 손을 거친 합창단은 마술처럼 세계 최고의 합창단으로 거듭났다. '사람의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악기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일흔을 훌쩍 넘긴 지금도 합창이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다. 아마추어 합창단인 '윤학원코랄'을 창단해 엔리오모리코, 안젤리아 보첼리와 협연하는 등 꿈같은 일을 현실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윤 감독은 2009년 미국 공연이 한국의 합창 수준을 미국 합창계에 강렬하게 인식시켜준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이는 한국적인 것으로 승부하겠다는 열정의 결과였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합창에서 늘 3가지를 강조한다. '한국적이고 세계화 가능한 것. 그리고 현대적인 것'이다. 이런 원칙에 의해 공간음악이 탄생했다. 그중 '팔소성'이 대표적이다. 팔소성은 8가지 웃음소리로 표현한 곡으로 '메나리'와 함께 공간음악의 으뜸으로 평가받는다. 한국형 공간음악을 창조한 셈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의 합창음악은 외국에 비해 200년 정도 뒤져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은 세계가 인정합니다. 한국적인 것으로 공간음악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지요."

◆화음으로 빚은 합창인생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음악가를 꿈꿨다. 전교에 손풍금이 하나뿐이던 시절, 음악교사의 칭찬으로 노래를 좋아하게 됐다. 여러 대회에 나가 수상도 했다.

그러나 인생의 진로가 달라질 뻔한 일이 있었다. 중학교 때 껄렁한 학생들에게 실컷 얻어맞고 돈까지 빼앗기는 일이 있었다. '사내자식이 맞고 다니냐'는 아버지의 핀잔에 권투 도장을 찾았다. "권투가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관장님으로부터 소질이 있다는 소리까지 들었지요."

권투선수의 꿈을 키웠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팔이 다른 선수에 비해 짧았다. 그에게 첫 번째 시련이었다. 곧이어 두 번째 시련도 찾아왔다. "중학교 2학년 때였지요. 경연대회에 나갔다가 무대 위에서 목소리가 안 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펑펑 울면서 내려오고 말았거든요. 변성기였던 건데 당시에는 음악은 끝이라고 생각했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음악 하면 먹고살기 힘들다'는 아버지가 음악을 그만두고 화학자가 되라고 했다. 결국 인천공고 응용화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였다. "신기하게도 인천공고에 밴드부가 있었어요. 끌리듯 밴드부에 들어갔고, 그게 오히려 음악에 심취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 성가대에서도 계속 활동을 했고요." 학교에서 밴드부 활동을 하며 음악에 대한 꿈을 다시 꾸게 됐고 작곡을 공부해 결국 연세대 음대 작곡과에 입학했다. "당시 교회 성가대 지휘자였던 분이 너는 꼭 지휘자가 돼야 한다며 직접 연세대 작곡과 입학원서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는 '물 만난 고기'였다. "대학교 3학년 때 연세대 기독학생연합회 합창단을 지휘했어요. 서울 명동 YWCA 회관에서 바흐 칸타타 106번을 초연할 때 수십 개의 소리를 내가 하나로 만들 수 있다는 기쁨에 전율하며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했지요. 그때 세상에서 흐트러진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빨리 모을 수 있는 것이 합창이란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도 솔로보다 합창을 좋아해

윤 감독이 말하는 합창의 매력은 다른 이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합창에서 중요한 건 다른 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독창자가 돋보이게 화음을 만들어줘야 하고, 틈새의 침묵도 즐기면서 내가 노래 부를 때를 기다려야 하지요. 옆 사람의 소리를 존경하고 귀 기울여야 내 소리도 근사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합창은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는 예술이란다.

대선을 두 달여 앞둔 시점이라 대통령의 자격에 대해 물어봤다. "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어요. 필요하다면 정치인도 합창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소리를 책임 있게 내면서도 다른 사람의 소리를 잘 듣고 융화하는 것이 합창의 근본이자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라는 설명이다.

최근에는 초'중'고 합창교육 의무화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학교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어요. 예체능 수업을 줄이거나 없애고 입시 위주로 변했기 때문이죠. 과거에는 학교에서의 합창반이나 반 대항 합창이 많았는데 거의 없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같이 화음을 내는 경험을 한다면 동료 아이들을 때리거나 왕따시키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이런 뜻에서 윤 감독은 어린이 합창단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이미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 수원 등에서 어린이합창단을 만들었다. "몇 년 안에 수백 개의 합창단을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합창의 매력과 정신을 심어 줄 생각입니다. 또 이를 계기로 아마추어 합창 운동이 펼쳐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독도 지킴이

일흔을 훌쩍 넘긴 데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윤 감독에게도 꿈이 있을까? 대답은 의외였다.

"독도 지킴이로서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독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감정을 음악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범국민적 독도사랑운동으로 전개할 예정입니다." 실제 윤 감독은 이날 인터뷰에 앞서 경북도로부터 독도 가곡 공모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데 이어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만나 1시간 넘게 일본의 독도침략 야욕에 대해 독도를 수호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독도 가곡 공모전을 통해 이제 독도는 마냥 신비하고 그리운 섬에서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함께 자리 잡는 민족의 섬, 문화의 섬,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음악을 통해 다시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이번 가곡 공모전으로 자라나는 후대들이 독도 노래를 많이 부를 수 있도록 적극 힘쓰겠습니다."

경북도는 다음 달에 '독도 가곡 공모전'을 공고하고 예선을 거쳐 다음해 3월에 우수작을 최종 선정한다. 선정된 곡은 전국합창경연대회 참가 등을 통해 독도 사랑에 대한 국민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활용된다. 이 과정에서 윤 감독은 독도 지키기를 자신이 펼치고 있는 아마추어 합창운동과 연계할 계획이다. "독도 수호는 무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문입니다. 문화적으로 해결해야 하고, 그중 음악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전 국민이 애창할 수 있는 공식 독도 가곡이 만들어져 세계만방에 울려 퍼지도록 하겠습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우태욱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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