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입생 때 서로 낯설어하던 학과 친구들 사이에 앙케트 노트가 돌려지기 시작했다. 친구들 서로를 파악하면서 빨리 친해지기를 바란 누군가의 풋풋한 아이디어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앙케트 문항을 떠올려보면 놀랍게도 내가 답했던 많은 것들이 지금의 답과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때 이미 내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이 이만큼이나 공고한 것이었는지를….
이번 추석, 부모님 집에 남겨둔 오래된 책장을 훑어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러한 책을 통해 내가 성장한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나의 취향과 관심에 의해 내가 선택한 책들이기도 하기에, 어찌 보면 내가 선택한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싶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직간접적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나 지혜가 있겠지만, 이미 내가 받아들이고 싶어 했던 것들이나 관심 가진 것들로부터 주로 자극을 받았을 수도 있기에, 사람의 생각의 틀이란 건 웬만해서 쉬이 바뀌는 것은 아닌가보다 생각이 들었다.
앙케트지에 있던 수많은 질문 중 기억하는 하나는 '어떠한 미래를 꿈꾸십니까?'였다. 이 질문에 당시에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확신에 차서 '행복한 삶'이라고 답했다. 당시에는 20년 후의 미래에 대해 직업도, 자산도, 가정도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은 없었기에 막연한 답 이외에 더 이상 상세하게 기재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당시에는 이러한 불안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20년쯤 훌쩍 지나버렸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 때였다. 그러나 정작 그만큼의 세월이 흐른 지금, 불행히도 이러한 불확실성의 감소에 큰 진전은 없었다. 어쩌랴, 지금에 와서도 외적 요소에 변화가 없다면, 또 다른 20년 후를 기대하기보다는 다른 수를 찾는 수밖에.
내가 바라는 '행복한 삶'이라는 답에 변화는 없다. 다만 동일한 답에 약간의 부연설명을 덧붙일 수 있을 정도일 뿐. 과거의 답변이 외형적인 조건이 어느 정도 충족된다는 전제하에 쓴 답이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여러 가지 전제조건들을 내려놓고, 현재 내게 벌어지는 사소하고 작은 일상에 행복해하는 삶을 꿈꾼다. 또한, 그러한 사소한 일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씩 투자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마음먹음이 부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기를, 또 행복 감지 센서가 영원히 녹슬지 않기를 소망한다. 더 소소하게는, 어느 아침 출근길처럼 나도 모르게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날이 조금만 더 자주 있어 주기를 바란다.
한국패션산업연구원 패션콘텐츠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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