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허균, 링컨,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에서부터 최근 대선 출마 선언으로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안철수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나름 일가를 이룬 이들 가운데는 독서광이 많다. 대입에서도 독서 실적을 반영하는 추세가 이어지면서 독서 교육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하지만 각종 영상 매체와 즐길 거리가 가득한 요즘, 부모의 관심 없이 아이들이 저절로 책에 몰입하게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국내외 교육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자녀에게 독서하는 습관을 길러 주려면 부모가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침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이다. 각각 동부도서관과 수성도서관을 애용하는 독서광 두 가족을 만나 독서 예찬론과 노하우를 들어봤다.
◆'독서왕' 오철희 씨네…"6개월간 543권…독서는 놀이"
6개월 동안 543권. 오철희, 황진주(대구시 북구 복현동) 씨 부부와 복현초교 6학년, 3학년인 오규민, 수민 남매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대구 동부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 숫자다. 덕분에 이들은 상반기 도서관이 선정하는 '책 읽는 가족'으로 뽑혔다.
오 씨는 선정 소식보다 그에 따르는 혜택이 더 반갑다고 했다. "1인당 한 번에 5권을 대출할 수 있는데 이젠 10권을 빌려볼 수 있게 됐습니다. 대출 기간도 10일에서 20일로 늘었고요. 이제 느긋하게 빌린 책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이 가족에게 독서는 어떤 의미일까. 황 씨는 책이 자녀들의 인생을 풍성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책은 삶을 바른길로 인도해주고 바쁜 부모 대신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교과 공부에도 도움이 됩니다. 책 읽는 습관이 붙다 보니 굳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를 하죠."
초등학교 때부터 자녀가 밤늦도록 학원을 전전하도록 만드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이 부부는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는다. 큰아들 규민이는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다. 막내딸 수민이 역시 학교에서 방과후수업으로 바이올린과 성악을 배우는 것이 전부. 그럼에도 두 아이의 성적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부부는 이것이 독서의 효과라고 믿는다.
오 씨의 자녀는 못 말리는 독서광이다. 규민이는 TV나 영화, 컴퓨터 게임보다 책이 더 좋다고 말한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나니아 연대기'만 해도 영화와 원작인 책을 비교해보면 책이 훨씬 더 실감 나고 흥미진진해요. 책이 옆에 있어야 든든해요. 밤에 잠을 안 자고 책을 읽다 야단을 맞고, 가족 소풍을 갈 때 책을 들고 가려다 어머니가 말리기도 하셨죠."
수민이는 활발한 성격으로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만큼은 예외다. 한 번 잡은 책은 쉽게 놓지 않고, 아무 곳에나 털썩 주저앉아 책을 읽곤 한다. "친구들이 TV에서 본 것들을 이야기해도 별로 신경을 안 써요. 책 읽는 게 더 좋아요."
사실 오 씨네 집엔 TV가 없어 수민이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야 할 수도 없다. TV를 없앤 건 황 씨의 생각. "여느 전업 주부들처럼 제게도 TV는 소중한 친구였어요. 그러다 10여 년 전 우연히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들은 뒤 TV를 치워버렸죠."
TV를 없앤 대신 저녁 식사 후 오후 8시부터 2시간 동안 조용히 가족이 함께 책을 읽었다. 식사 후 설거지 등 뒷정리 시간을 줄여 가족이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더 확보하려고 식기세척기까지 구입했다. 부부는 책나무도 만들었다. 집 안 한쪽 벽에 커다랗게 나무를 그리고 아이들이 책을 읽을 때마다 책 제목을 적은 나뭇잎을 그리도록 한 것. 책을 읽을수록 앙상했던 나무는 풍성해졌고 그 나무를 보면서 아이들은 더욱 독서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
황 씨는 자녀의 독서 습관은 부모에게 달렸다고 강조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말하는 대로가 아니라 부모가 보이는 모습대로 큰다고 하잖아요. 퇴근 후 소파에서 쉬면서 TV를 보는 게 낙이었던 남편이 기꺼이 동참한 것도 큰 힘이 됐어요. 덕분에 아이들은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됐어요."
◆"할머니 감동, 손녀에게 그대로" …독서 대물림 김희준 씨네
'노란 손수건'(오천석 작)은 김희준, 권희선(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씨 부부와 외동딸 김수빈(정화중 3학년) 양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 이웃들의 감동적인 실화를 추려 담은 것. 출판가의 스테디셀러 중 하나인데 이 가족이 아끼는 것은 1975년 판이다. 권 씨가 꺼내 보여준 책 속 종이는 빛이 바랜데다 세로줄로 쓰인 문장,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는 옛 방식으로 출판된 것이었다.
"내용이 감동 깊을 뿐 아니라 제 어머니가 읽고 주신 책이라 더 소중해요. 아이도 자신을 키워주신 외할머니가 보시던 책이라며 애지중지합니다. 3대가 함께 읽은 책인 셈이죠."
김 씨 가족이 수성도서관을 찾는 것은 일상. 권 씨는 매주 화요일 유아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서가를 정리하는 봉사활동을 한다. 책을 빌리는 것도 이들이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자주 하는 이유. 한 달에 평균 70여 권의 책을 빌려 간다. 빌린 책 중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별도로 구입, 두고두고 읽는다. 이들 가족에겐 도서관이 수많은 책 가운데 어떤 것을 사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주는 셈.
"어릴 때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자주 다니곤 했지만 아줌마가 된 뒤엔 책에서 멀어졌어요. 그러다 아이가 예닐곱 살 될 무렵 무엇을 아이에게 유산으로 남겨줄까 고민하다 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때부터 가족과 함께 도서관을 드나들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습관이 든 수빈이는 교과성적이 최상위권. 특목고에 들어간 뒤 해외 대학에서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공부하는 것이 꿈이다. 권 씨는 딸이 좋은 성적을 얻고 있는 바탕에는 독서가 있었다고 말했다. 또래보다 생각의 폭이 넓고 깊어 학습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 수빈이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국어 문제의 지문을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이해할 수 있어요. 역사, 사회 수업 때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선생님이 말씀해주시면 예전 책에서 읽었던 그 시대 배경이 머리에 떠오르죠. 왜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 사건 전후 시대 흐름은 어떤지 쉽게 감이 잡힙니다."
어머니나 대학교수인 아버지가 권해주는 책도 보지만 수빈이는 나름대로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 한 가지 주제에 관심이 있으면 그 분야 책을 집중적으로 챙겨본다. 가령 디스토피아(어두운 미래상)에 흥미가 생기면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등을 찾아 읽는 식이다.
수빈이는 독서가 학습에 도움이 되기 위해선 내용을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다고 했다. "머리말은 작가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에요. 책을 잡으면 반드시 머리말부터 읽어요. 책을 읽은 뒤엔 간단하게라도 내용, 느낌 등을 기록합니다. 그러다 보면 무엇을 읽었는지 머리에 잘 남을 뿐 아니라 글 쓰는 데 대한 두려움도 사라져요."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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