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선산(일선)인 점필재 김종직과 함양초등학교 느티나무

입력 2012-08-30 13:56:40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을 애도하며 심어

조선 전기 수십 명의 인재가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 길에 나선 대사건이 바로 1498년(연산군 4)에 일어난 무오사화다. 후에 있었던 여느 사화와 달리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사건의 단초는 탁영이 스승 점필재(金宗直'1431~1492)의 조의제문(弔義帝文'중국의 고사를 인용해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사초로 활용한 데 있었다. 따라서 영남사림파의 종조(宗祖)로 존경받는 점필재는 유택에서 끌려나와 사지가 찢기는 처참한 형벌을 당했다.

공은 야은 길재(吉再)에게 성리학을 배운 김숙자(金叔滋'1389~1456)의 아들이다.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시작으로 박사, 감찰 등을 두루 지내다가 1464년(세조 10) 세조가 천문'지리'음양학 등 잡학을 공부한다고 비판하다가 파직된다. 이듬해 경상도병마평사란 직책을 받으며 다시 출사하면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접어들었다. 수찬, 이조좌랑 등의 벼슬과 세조, 예종 두 왕조를 거쳐 1471년(성종 2)에는 예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으로 승진하였다.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외직을 희망하자 성종은 고향 밀양이 가까운 곳이자 산수가 아름다운 함양군수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어느 날 학사루(경남유형문화재 제90호)에 오르니 평소 못마땅했던 김안로의 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떼어 불사르게 한 것이 그와 사감(私感)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함양군은 차(茶)를 진상(進上)했다. 그러나 군내 어느 농가에서도 차를 재배하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부과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웃 고을, 즉 차가 생산되는 고장에 가서 쌀 한 말을 차 한 홉과 바꾸어야 되니 군민들의 부담이 컸다.

공은 828년(신라 흥덕왕 3) 견당사로 중국에 갔던 김대렴(金大廉)이 차나무 씨를 가져와 하동'구례'산청'함양 등에 심었다는 기록을 보고 '아 우리 군이 바로 이 산 밑에 있는데 어찌 신라 때 남긴 종자가 없겠는가'하면서 나이 많은 분들에게 조사를 시킨 결과 엄천사(嚴川寺) 북쪽 대밭 속에 두어 그루가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은 매우 기뻐하며 그 땅을 차밭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관영다원(官營茶園), 즉 관에서 직접 차를 재배하는 차밭이 되었다,

공의 생애 중 함양군수 시절이 개인적으로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고향 인근이라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었고, 차밭을 만들어 고을 사람들의 민원을 해결하고, 농업용수시설을 보수하는 등 선정을 펼치자 곳곳마다 선정비와 생사당이 들어설 정도로 널리 존경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김일손과 정여창, 김굉필 등 훌륭한 제자를 키워 후일 그들이 영남학파는 물론 조선 성리학의 맥을 이어 나갔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시간이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마(魔)가 끼는 법. 1474년(성종 5) 막내아들 목아(木兒)가 다섯 살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죽고, 그해 여름에는 딸이, 가을에는 맏아들마저 죽고 말았다. 슬픔을 견디지 못한 공은 사직서를 올렸으나 당시 경상감사 강희맹은 수리하지 않고 간곡히 만류하여 하는 수 없이 복귀했다. 공은 막내아들 목아를 잃은 심정을 시로 쓰고 한 그루 나무를 심어 위로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어찌 이리 바삐 가느냐/다섯 살 생애가 전광석화 같구나

어머니는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이때야말로 천지가 아득하구나.

중종반정으로 신원되고 밀양의 예림서원, 구미의 금오서원 등에 제향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 '점필재집' '유두류록' '청구풍아' 등이 있다. 오늘날 함양초등학교 교정을 지키고 있는 큰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407호)는 그때 죽은 목아를 위해 심은 나무라고 한다. 다른 느티나무와 달리 판근(板根'책받침 같은 뿌리)이 잘 발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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