멱감고 씨름하던 거랑 모래사장…마음속에 남은 소꿉쟁이 '가시내'들
고향 상주를 떠나 대구에 온 것이 1966년 10월 1일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전근이 돼 왔다. 34년이나 나를 품에 안아 보살펴 준 상주, 내가 태어나서 잔뼈가 굵고 조상이 묻혀 있는 땅이기에 고향을 떠나 대구로 집을 옮겨 산 지 46년, 근 반세기가 되었지만 꿈에도 어릴 때 놀던 산과 들 거랑(냇가), 동무들 모습이 나타난다.
지금은 승용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런데도 벌초하는 날이나 묘사를 지내는 날 아니면 고향에 가는 일이 별로 없다. 처음에 대구로 이사를 왔을 때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말처럼 손수레에 끌고 가는 감을 봐도 고향이 생각났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꼭지 달린 감이/손수레를 타고 온다.//아스팔트에 덮여서/흙이 숨을 못 쉬는/대구 한복판에//상주군 사벌면 덕골, 황새골/우리 밭 우리 감나무 가지를/붙잡고 있던/엄마 젖꼭지만큼이나/손에 익었던 감//할매 쪽진 머리처럼/꾸미지 않은 감꼭지//아버지 목소리만큼 /떫덜 구수한 맛 /내 살점 속엔 /그런 감 맛이 들었다. //아저씨 끌고 가는/손수레에 /할매 산소 냄새가 난다. // 황새골 억새풀 흔드는 / 바람이 /내 살결을 스친다. (최춘해의 '꼭지 달린 감')
황새골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산과 논밭, 선영이 있어 어릴 때는 여기서 거의 살다시피했었다. 내가 살던 마을 덕골은 동북쪽으로 건지산(정식 이름은 금지산)이 둘러 있고 덕골 마을 앞으로 흐르는 거랑(작은 내)이 있다. 강 둘레에 들이 펼쳐져 있는데, 큰물이 지면 둑이 터져서 홍수가 날 때도 있었다. 이 거랑 물이 들을 적셔 주어 벼농사를 많이 짓고 있다. 거랑 둑 너머 사시사철 맑은 물이 펑펑 솟아나 멱 감고 빨래터로 좋은 큰 웅덩이가 있었다. 한여름에는 여기서 입술이 새파랗도록 헤엄을 치며 놀았다.
또 달밤이나 별이 총총 흐드러진 밤에는 마을 아이들이 모여서 거랑 보드라운 모래사장에서 씨름을 하거나 숨바꼭질을 하며 즐겼다. 이웃 동네 황리(정식 이름 황룡) 아이들을 불러 씨름 시합을 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 아이들은 이 거랑에서 씨름을 많이 했기 때문에 씨름 선수가 많았다. 키가 더 큰 아이들을 이기고 나서 의기양양했었다.
한여름 밤에는 돗자리를 깔고 모래사장에서 하늘의 총총한 별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집으로 갔다. 그러던 거랑은 지금은 덕가 못이 되어 흔적 없이 사라졌다. 달래를 캐서 머리를 땋아 새색시를 만들고 모래로 밥 짓고 달래, 냉이, 꽃다지 캐어 소꿉장난하던 귀열이, 소열이, 월분이, 남혼들도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고향에 가도 어릴 때 고향 모습은 마음속에만 남아 있고 모두가 변해서 낯이 설다.
건지산은 함창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모과골(정식 동명은 목가리)로 넘어가는 솔티고개가 있고, 조금 더 동쪽으로는 서낭당고개가 있다. 모과골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솔티고개로 가고, 서쪽으로 가면 추가 못이 있고 추가 못을 지나면 양정역이 나온다. 이 양정역에서 조금 더 가면 유명한 공갈못이 있다. 지금은 공갈뭇 터 표지판만 있지만 그 못이 무척 넓었다. 이 못물이 상주들판의 농수가 되었다. 가을 농사를 다 지어 놓고 못에 물이 마르면 가래를 가져가서 잉어를 잡았다. 추가못에서도 잡고 공갈못에서도 잡았다. 잉어가 가래 속에서 가래(통발)를 꼬리로 치는 느낌은 대단하다는 말만 어른들에게 들었다. 공갈못 노래를 옮겨 본다.
상주 모심기 노래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큰애 기--
연밥- 일랑- 내따줄게-- 우리-부모님 섬겨주 오--
(상주 모심기 노래는 11절까지 있는데 나머지는 생략한다.)
덕골에서 북쪽으로 향한 길이 서낭당 길이다. 이 길로 함창장, 점촌장을 보러 다녔다. 이 서낭당 길은 인가가 없이 길게 뻗쳐 있어서 호랑이나 강도가 나온다고 해서 날이 어둡기 전에 지나가려고 서둘렀다. 이 서낭당 길로는 문경새재를 지나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갔었다. 또 소 장수가 이 길로 소를 몰고 한양으로 가기도 했다. 그보다 더 동쪽으로는 갈미고개가 있다. 서낭당 길도 갈미고개 길도 덕가 목에 묻히고 못가로 새로 포장도로가 생겼다. 먹실고개(갈미고개)를 지나면 먹실(묵상리)이 나오고 한 고개를 더 넘으면 매호가 나온다. 매호초등학교가 폐교되고 거기에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매호초등학교(사벌동부초등학교)는 나의 첫 근무 학교여서 감회가 깊다.
덕골에서 남으로 가면 조골을 거쳐 사벌면 소재지가 나온다. 면소재지까지는 십 리 길이다. 어릴 때는 부지런히 가야 1시간에 갈 수 있었다. 당시는 재학생이 800명이 넘는 큰 학교였다. 어릴 때는 그렇게 넓던 운동장이 지금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좁게 보였다. 그리운 동창생들, 인자하신 선생님들 기억 속에만 남아 있고, 건물도 옛 건물이 아니다. 여기서 소풍을 갔던 곳이 사벌왕릉과 경천대이다. 그때는 걸어서 다녔기 때문에 무척 멀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포장도로가 나서 아주 가까워졌다. 사벌왕릉이 있는 삼덕에서 낙동강을 건너면 도남서원이 있다. 서원 앞쪽에는 4대 강 사업으로 경천교가 건설되고 생태공원으로 정비해 놓았다. 낙동강 생물자원관이 새로 세워졌다. 앞으로 도남서원 주변은 관광 효과가 클 것 같다.
도남서원은 1606년 정경세 등이 영남 5현인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을 제향하기 위해 무심포에 세운 서원이다. 그 뒤 노수신, 류성룡, 정경세, 이준이 추가 배향되었다. 도남서원은 1676년(숙종 2년) 사액되고 1797년(정조 21년) 동서재를 세웠으며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92년 지역 유림의 힘으로 강당 등이 세워졌다.
낙강시제는 상주의 낙동강을 중심으로 1196년 백운 이규보로부터 1862년 계당 류주목의 시회에 이르기까지 666년 동안 도남서원'경천대'누정'선상 등지에서 총 51회에 걸쳐 이어진 유서 깊은 시회(詩會)다. 2011년 시회 때는 조선조에 펼쳐진 낙강시회를 재현하고 그 정신을 이어 받고자 경북지역 문협지부 회원과 각 지역의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200여 명이 참가해 선인들의 자연과 인간과 시 사랑의 호방한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문학의 장을 한껏 펼쳤다. 현재 상주에서 선비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단체로는 상주문인협회와 상주아동문학회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주된 문인으로는 권태을, 권형하, 김연복, 김재수, 김한수, 민병덕, 박두필, 박정구, 박찬선, 신덕수, 이상달, 이창모, 이칠우, 장원달, 정복태, 조재학(가나다 순) 등이다. 상주가 고향이거나 상주를 거쳐 타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인으로는 강세준, 강현국, 권태문, 김상삼, 김종상, 박노익, 박두순, 신현득, 이재호, 정재호, 최춘해, 하청호(가나다 순) 등이다. 상주가 삼백(쌀, 곶감, 누에고치)의 고장이라는 건 잘 알지만, 선비 마을이라는 건 잘 모르는 이가 있다. 이 선비 정신은 영원무궁 이어지리라 믿는다.
최춘해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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