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취재 작업 2년 매달려…감성 절제 '르포식 만화' 사회적 역할
그는 만화가 누구나의 어린 시절이 그랬듯 만화책을 쌓아 놓고 읽기 좋아하고, 수업 시간이면 선생님 몰래 연습장에 만화를 그리던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데 실은 만화보다 더 좋아한 것이 있었다. 친구들이나 부모님께 종이에 이런저런 만화를 그려 선물했고, 상대방이 자기 만화를 보고 웃고 기뻐하면 그저 좋았다. '사람 냄새'에 끌렸다. 여기서 그의 만화 인생이 출발했다. 최근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백혈병 문제를 다룬 만화 '삼성에 없는 단 한가지-사람 냄새'를 펴낸 김수박(38) 작가의 이야기다.
◆만화가 김수박
대학 진학을 앞두고 그는 진로를 분명히 해야 했다. 좋아하는 것은 그림. 하지만 잘하는 것은 마땅찮았다. 미대에 진학할까 생각했지만 등록금이며 비싼 그림도구 등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래도 그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설계도'를 그리는 대구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결국 대학 졸업을 앞두고 그에게 돌아온 질문은 "뭐하고 살지?"였다.
"당시 만화가가 되려면 유명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하지만 당시 만화계는 변하고 있었습니다. 온라인 웹툰이 뜨기 시작했죠. 누구나 만화를 게재할 수 있고, 누구나 댓글 등으로 반응하며 작가와 독자가 메시지와 느낌을 주고받았습니다. 실은 만화뿐만 아니라 세상의 소통 방식이 그렇게 변화하고 있었어요." 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일단 좋아하고, 약간 잘하는 것을 하자.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면 잘 할 수 있겠지"였다. 결국 만화였다. 그렇게 만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용산 참사를 접하다
2009년 1월 20일이었다. 그도 누구나와 다름없이 평범한 시민의 눈으로 신문 기사와 TV 뉴스를 통해 '용산 참사'를 접했다. 용산 참사는 서울 용산구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세입자'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경찰'용역직원들 간에 충돌이 벌어진 가운데 화재가 발생,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다. 당시 그는 자신이 1년 뒤 용산 참사를 다룬 만화 '내가 살던 용산'에 참여한 작가들 중 한 명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뉴스 한 장면이 그의 눈에 박혔다.
"당시 불이 났을 때 망루에서 떨어져 건물 옥상 난간에 겨우 매달려 있던 지석준 씨 허리에 경찰이 물대포를 쏘는 장면이 TV 영상에 잡혔습니다. 굉장히 상징적이었어요. 그리고 굉장히 비상식적이었습니다.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요."
그가 보기에 용산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은 법과 제도가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런 경우 역사를 되돌아보면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했습니다. 그것이 역사가 발전하는 모습이에요. 하지만 당시 대화와 협상은 없었고, 일방적인 진압만 있었습니다. 농성하던 시민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았죠."
그래서 죽고 다치며 고통 받은 것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었다. 유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빠와 남편이 테러리스트'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혔다. 그가 보기에 단순히 사람이 죽은 것 이상의 사회적 문제였다. "용산 참사와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지고, 반복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만화라는 매체가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진실을 외치는 르포 만화
그는 만화에서 감성은 절제하고, 대신 사실을 담담하게 열거하는 '저널리즘'의 방식을 철저히 취해야 '진실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문기사로 치면 '르포'(특별한 사건이나 현장 체험 등을 보고자의 주관을 개입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한 기록)를 만화로 구현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보기에 용산 참사는 밝혀지지 않은 사실과 언론이 외면한 사실을 적잖게 갖고 있었다. 취재를 통해 작품 속에 열거할 사실들이 적잖았다. 마지막으로 작가만의 '비판 의식'을 작품에 녹여 냈다. 그렇게 1년여의 작업을 거쳐 그를 비롯한 6명의 젊은 만화가들이 참여한 '내가 살던 용산'에 고 윤용헌 씨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철거민' 편을 실었다.
사실 이전까지 만화는 기존 사실이나 작품을 재구성해 '만화화'하는 후발 매체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내가 살던 용산'은 만화가 사회에 먼저 화두를 던진 격이었다. 이후 언론의 후속 보도도 뒤따랐고, 최근 용산 참사를 다룬 영화 '두 개의 문'이 개봉하는 등 사회적 관심과 움직임을 계속 이끌어내고 있다.
◆사람 냄새를 이야기하다
담담하게 용산 참사를 이야기한 그를 주목한 사람이 있었다. 보리출판사 윤구병 대표가 "삼성 관련 문제를 이야기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그는 무작정 취재에 돌입했다. 삼성 관련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여러 사안들 중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백혈병 문제가 눈에 띄었다.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언론에서 보도가 잘 되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이 잘 모르고, 피해자들은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용산 참사를 접하며 얻은 경각심이 더해졌다. 이와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지고, 반복될까 하는 것이었다.
만화 작업을 하며 파악한 백혈병 관련 사망자만 수십 명이었고, 침묵하고 있던 제보자들도 속속 나타났다. 취재한 자료가 산더미같이 쌓였고, 결국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들 중 한 명인 고 황유미 씨와 딸의 사망 의혹을 밝히기 위해 뛰어다니던 아버지 황상기 씨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렸다. '내가 살던 용산'과 마찬가지로 르포 형식을 취했다. 그렇게 2년 여 작업 끝에 펴낸 작품이 바로 '삼성에 없는 단 한가지-사람 냄새'다.
◆희망과 행복을 잇는 직업, 만화가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개인 홈페이지의 소개글에 자신을 대표하는 키워드가 '희망'이라고 적어 놓았다. 그에게 희망이란 무엇일까?
그는 '행복을 찾는 과정'이라고 답했다. 삶의 본질은 고통인데 가장 밑바닥에 행복을 얻고자 하는 희망이 있다는 것. '내가 살던 용산'의 고 윤용헌 씨 가족과 '사람 냄새'의 고 황유미 씨 가족 모두 작은 희망을 갖고 현재 행복을 얻으려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만화는 이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것이기도 하지만 행복해지려는, 그저 평범한 희망을 응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게 향후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전에는 미래를 머릿속에 그렸고, 또 이야기했었단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는 걸 깨달았단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하더라도 그 주변에서 소중한 무언가와 반드시 만나게 되더라고요. '내가 살던 용산'과 '사람 냄새'를 그리게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흘러오다 보니 그렇게 돼 있더라고요. 그래서 '향후 계획은?'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도 궁금하다'입니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작가로 살며 만나게 되는 무언가를 계속 만화로 그려낼 거라는 점이에요. 최근 두 작품('내가 살던 용산'과 '사람 냄새')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향후 계획이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기자가 보기에 그는 우리 사회 어딘가에 있는 작은 희망들을 찾아 행복과 연결시켜주는 작업을 계속 하려는 듯 했다. 부단히 '사람 냄새'를 쫓고 있는 그였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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