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33)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최송설당

입력 2012-08-17 07:31:58

역적 후손서 상궁까지 험난한 삶, 전 재산 학교 바친 뜻은…

최송설당이 만년에 머문 김천고 뒤편 송정동산. 정걸재는 6
최송설당이 만년에 머문 김천고 뒤편 송정동산. 정걸재는 6'25때 불타 없어지고 취백헌에는 친척이 기거하고 있다. 송설동문회 정향택(35회) 부회장이 설립자인 송설당의 채취가 남은 송정동산을 찾아 높은 뜻과 성품을 설명하고 있다.
김천고 뒷산에 있는 송설당 묘.
김천고 뒷산에 있는 송설당 묘.
김천고 송설역사관 입구에 서있는 최송설당 동상
김천고 송설역사관 입구에 서있는 최송설당 동상

'통 큰 기부'. 요즘 언론 등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있는 사람이 좋은 뜻을 실현하고자 거금을 쾌척하는 일을 '통 큰 기부'라고들 한다. 세계적 거부인 워런 버핏, 빌 게이츠 등의 '통 큰 기부'가 가끔 신문지면을 장식한다. 안철수 서울대교수의 거액 기부도 정치적 행위 논란과는 별개로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이다.

서양에서는 가진 자들의 '통 큰 기부' 문화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통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됐다.

황악산 자락 김천에도 통 큰 기부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 있다. 최송설당(崔松雪堂'1855~1939)이다. 역적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각고의 노력으로 궁에 들어가 상궁이 된다. 그는 모은 전 재산을 고향 김천의 민족사학 설립과 자선 활동에 모두 바쳤다. 또 송설당은 가사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각자다.

◆통 큰 기부로 김천고를 설립하고

"김천은 내가 태어난 곳이다. 영남의 요충지이자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한 곳이다. 이곳 송정이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답고 훌륭한 인물 배출이 영남의 다른 고을보다 곱절이 넘음에도 교육여건이 아직 유치한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실로 자금을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사회발전은 인재 교육에 달려 있고 교육의 확장은 재정을 마련하는 것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만약 지금 재정이 궁핍하다는 이유로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사회의 급한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30만2천100원을 출연하여 김천 중학교 설립 자금으로 찬조하오니…."

1930년 2월. 동아'조선일보 등 조간신문에 최송설당이 고향인 김천에 학교설립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았다는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당시 쌀 한 가마가 13원 정도니 30만2천원은 요즘 화폐가치로 정산하면 30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송설당은 처음에는 전 재산을 사찰에 희사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사찰은 친일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어 기부가 일본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때 만해 한용운(韓龍雲), 애산 이인(李仁) 등이 나서 송설당에게 육영사업을 권했다고 한다. 여성이 육영사업에 나선 것은 당시엔 드물었다. 이로써 자금난으로 지지부진하던 김천고등보통학교(지금 김천고)의 설립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총독부가 인문계 학교에서 배출되는 인재들이 독립운동에 눈을 돌려 식민지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경계하여 인문계가 아닌 실업계 학교로의 변경을 집요하게 강요했다. 이에 지역 설립후원회 인사들이 송설당을 찾아 실업계학교 변경을 요청하자 "내가 학교를 세우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민족사상 교육이 목적인데 그것이 안 된다면 재산 기부를 취소하겠다"며 거절했다. 송설당은 박영효, 박영철, 한상룡 등 당시 지도층 인사와 일본인 사업가 등을 움직여 1931년 2월 마침내 송설교육재단 설립을 인가받았다.

◆송설역사관을 찾아

광복절을 앞두고 최송설당이 설립한 김천고를 찾았다. 마침 이날 단비가 내렸다. 입추가 지났건만 연일 불볕더위로 산천초목까지 목마름에 지쳐 있던 상태라 더위를 식혀주는 단비는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교정에 들어서자 학교 본관 입구에 세워진 송설당 동상이 먼저 반긴다. 동상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세월의 연륜을 말해주듯 송설당의 고고한 기품을 빛나게 하는 듯하다. 이웃한 송설역사관을 찾았다.

역사관에 들어서면 정면에 자리하고 있는 또 다른 송설당 동상에 먼저 눈이 간다. 최근에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596호로 지정됐다. 동상은 1935년 11월 조선 최초의 조각가 김복진이 제작했다. 생존해 있던 사람의 동상을 만든 것은 드문 일이었다. 처음 동상은 황동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물자 부족이 극심하자 동상이 강제 공출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창회에서 1950년 김복진의 제자 윤호중에 의뢰해 복원했다. 본관 입구 동상은 지난해 개교 80주년을 맞아 복제하여 세운 것이다. 역사관 1층에는 송설당의 일대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역경을 딛고 모은 재산으로 자선사업을 펼쳐

송설당은 김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화순. 선조 대대로 관직에 나아가는 명문가로 알려진 집안이었다. 그런데 증조부 외가가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는 바람에 역적 집안으로 몰락하게 된다. 아버지 최창환은 전라도 고부에서 친척들이 많이 사는 김천으로 이사하게 되고 이때 송설당이 태어난다. 사대부의 후손으로 문장이 좋았으나 연좌로 인해 벼슬길이 막힌 아버지가 서당 훈장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으나 가정은 궁핍했다. 송설당이 가사문학에 조예를 보인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1886년)를 여읜 송설당은 삯바느질과 콩나물 장수로 연명하다가 교동의 백씨 문중으로 시집을 간다. 그러나 남편이 병사하는 불운을 겪는다. 과부가 된 송설당은 친정으로 돌아와 생계를 위해 김천 장터에서 음식점을 열었다. 이때 상당한 재물을 모았다. 송설당은 비록 여자이지만 서울에 가서 입신하고 또 역적의 오명을 쓰고 있는 선조의 신원(伸寃)을 결심하고 상경한다. 불심이 깊었던 송설당은 봉은사를 자주 찾아 기도를 한다. 여기서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는 엄상궁(후일 엄비)의 동생과 인연이 닿게 된다. 엄상궁은 민비의 뒤를 이어 왕비로 책봉되고, 왕실에서 왕세자를 갈망하는 얘기를 듣게 된 송설당은 엄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왕자 탄생을 위한 백일기도를 드린다. 과연 엄비가 수태하고 산달이 다가오자 산후조리에 필요한 일체의 비품을 궁에 바치는 등 정성을 쏟는다. 왕자가 태어나자 입궐하여 영친왕의 보모 상궁이 된다. 고종과 엄비의 신임을 받던 송설당은 1901년 왕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는다.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몰적(沒籍)된 화순 최 씨 가문의 죄를 사면하고 복권하라'는 고종의 어명을 받은 것이다.

화무십일홍.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되고 영친왕은 그해 12월 일본으로 가려고 경성을 떠난다. 이듬해 1월 송설당은 궁에서 나와 누룩골(지금 무교동)에 거주하게 된다.

궁을 나온 송설당은 어려운 이웃을 위한 자선사업에 눈을 돌린다. 1908년 '공립신보'의 의연금 모집에 대한매일신보를 통한 4원 기탁이 시작이었다. 1914년 고향인 김천에 흉년이 들어 지역민들이 기아에 허덕인다는 소식을 듣자 벼 50석을 희사한다. 이듬해에는 경성부인회에 거금을 내고 일본 적십자사 특별회원이 되기도 한다. 이어 금릉유치원, 금릉학원에도 유지비 일부를 보태기도 했다.

불심이 깊었던 송설당은 증산 수도산 청암사 중창불사에 거금을 시주하는 등 전국 사찰에 많은 재물을 보냈다. 지금도 각 사찰 큰 바위나 비석에는 음각된 '崔松雪堂'(최송설당)이란 글자가 남아 있다.

◆송설당이 머문 송정동산에는 붉은 배롱나무 꽃이 가득하고

역사관을 나와 송설당의 자취가 서린 송정동산을 찾았다. 이곳은 김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면 누구나 소풍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송설당은 65세 되던 해인 1919년 말년을 보낼 요량으로 김천에 내려와 이곳에 정걸재(貞傑齋)를 지었다. 이를 고부재실(古阜齋室)이라고도 한다. 목재는 압록강 홍백송을 사용했고 경북궁 근정전을 건축한 목수가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때 불에 타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고 살림집으로 사용하던 취백헌(翠栢軒)만 자리한다. 송설당의 근검절약 성품도 회자되는데 일하는 사람이 쌀을 씻다가 몇 알이라도 쌀뜨물에 흘려나가면 '입립농민한'(粒粒農民汗'쌀 한 톨 한 톨이 농민의 땀이다)이라고 꾸짖고 식사의 반찬은 고추가 들지 않은 물김치 등 몇 가지의 소찬에 불과했다고 한다. 어느 날 아랫사람이 닭을 잡고 닭발을 끊어 버렸더니 "닭발을 구워 먹으면 맛이 좋은데 아깝게 버리다니 당장 찾아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정걸재 앞 정원의 배롱나무에 꽃이 만발해 있다. 매미는 가는 여름이 아쉬운 듯 "맴맴" 더욱 소리 높여 목청을 뽐낸다. 송설당은 이곳에서 85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송설당은 눈을 감으면서 아래와 같은 유언을 남겼다.

"길이 사립학교를 육성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잘 교육받은 학생 한 사람이 동양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마땅히 이 길을 따라 지키되 부디 내 뜻을 잃어버리자 말라."(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一人邦定國 一人鎭東洋 克遵此道 勿負吾志)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최신 기사